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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편의 시
나는 보수 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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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수 주의자다
-연제영-


내 나이 마흔 살
나는 보수주의자다



어둔 밤 단단한 모습으로 먼 곳까지 빛을 발하는 외로운 담배 대가리이다 나 사십대의 보수주의자는 처절하게 빌붙는 날파리를 경멸하는 듬직한 황소의 꼬리털이며 거친 파도를 하얀 물거품으로 답례하는 뿌리 깊은 바위덩이다

육중한 코끼리가 지면을 밟아 나가듯 창공의 독수리가 대지를 훑어 나가듯 역사와 경제를 검증, 분석하고 민심의 동향을 온몸으로 파악하며 믿음이 되어버린 온갖 굳은 사고를 열린 공간 위로 펼쳐 보이는 나는 민중으로서의 보수주의자다 세상과 인연을 맺은 이상 불같이 분노하고 들풀 처럼 감동하기 마련 일상의 매듭을 소중히 여겨 지치고 사랑하고 지치고 사랑하고 지치면 다시 처절하게 사랑하는 나는 사십대의 핏덩어리다

한 줌의 바람이 솔잎을 핥아내듯 느긋한 파도가 갯벌을 쓸어 안듯
생리를 하는 딸년 앞에서 수음하는 아들 놈 앞에서 성의 아름다움을 들려주는 나는 맛의 깊이 그윽한 된장찌개다 첫 키스의 황홀함을 잊지 않듯 사람에 대한 사랑을 끊지 않고 내 살을 씹어 삼키는 곤혹 속에서도 결코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 나는 이파리 하나 없이 겨울을 견뎌낸 철든 나무이며 온 천지를 들어 엎으면서도 그대로 자연에 순응하는 가멸 찬 봄의 태양이다


나! 사십대의 보수주의자는
이 땅의 기성인을 향해 가벼운 손가락질을 해대는 탱탱한 손가락을 질끈 물고 잘근잘근 씹어대는 지랄 같은 미친개이며 좀처럼 어둠을 내색 안는 눈 덮인 산이다 아스팔트를 뚫고 나와 넓은 그늘 펼쳐 보이는 넉넉한 은행나무인 나는 굵고 넓은 뿌리를 대지 저 깊이에 박아두고 가지와 이파리를 지탱하여 주는 견고한 거멀못이다

산 원숭이의 골을 꺼내 먹고 어미 소의 배를 갈라 송아지를 갈아 먹는 이여 어린 계집의 치마 속에 환장한 수컷들이여 환각에 눈이 멀고 도박에 손이 굳고 돈에 양심이 썩고 지나간 과거에 빠져 현재를 망각해 버린 허울에 빠진 이들이여 자욱한 안개 그 속의 갈대 숲에 웅크린 병약한 자신을 일으켜 세워 여기의 나를 봐라 서슬 퍼런 내 눈이 말을 하니 나는 보수주의자다

역사에 대한 분노와 정치에 대한 적개심과 믿음에 대한 혼란 과학에 대한 사상과 철학의 침묵 ...이 무거운 흐름...그러나... 내 짐에 세상 짐 한데 얹어 버겁게 걸으면서도 결코 벙어리가 될 수 없는 나는 발소리의 존재를 자각케 하는 어둔 밤의 냉랭한 개소리이다


그 어느 순간부터 안중근 의사의 검은 손바닥을 뜨거운 가슴 안에 아로새긴 나는 이 시대의 피 끓는 보수주의자 오늘을 살아가는 이 몸이 불혹의 준엄한 발걸음으로 묵직하게 걸어 나갈 터이니 그대들이여 나를 봐라 나는 이 시대의 당당한 보수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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