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런 인생, 저런 인생 많은 세상일들 소설로 남겨주세요
(중편)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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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제가 이 글을 쓰게된 이유는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전 예수쟁이입니다.
흔히 '크리스챤'이라고도 표현합니다만 전 남들이 편한대로 불리어지기를 원합니다. 흔히 크리스챤을 비꼬아 말하기를 "저 사람은 예수쟁이야." 라고 부릅니다. 마치 예수쟁이가 무슨 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들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예수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를 믿기 때문이지요.
저를 예수쟁이라고 부르십시오 전 감사히 듣겠습니다.

이 글은 저의 성장 배경을 다룬 것입니다만 모두가 진실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유는 밝히기 어려운 분들도 있고 제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저는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 내가 싫어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계획 중 에 하나 일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 아버지]
아버진 어렸을 때부터 고생이 많으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셨다. 아버지는 위의 형에게서 구박을 받으셨는데 구박이라고 해봐야 형은 공부를 했지만 동생인 아버지는 공부를 시키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하듯 아버지는 공부를 그렇게 하고팠다. 마침 교회 전도사가 스승을 자처했고 결국 아버지는 교회의 전도사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형님과의 차별에 그것을 벗고자 가출을 했었는데 그때의 경험으로 전국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타고난 손재주가 있어 가는 곳마다 좋은 인상을 남겼다고 들었다. 그 즈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를 가나 집 생각에 밤마다 집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셨을 것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이는 곧 장가갈 나이인지라 먼저간 형님이 권했고 그러다 선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여자가 엄마였다. 첫인상은 사람이 좋게 보였나 보였다. 착한 아버지는 엄마를 놓치기 싫어서 뻥(거짓말)을 쳤는데 논이 몇 마지가 있고 밭이 어쩌고 무슨 농사한다고 했다. 그렇게 결혼을 한 아버지는 교회에서 목사님의 주례로 식을 올렸다고 한다. 더구나 아버지껜 입심이 있어 왠만한 거짓말도 모두 믿게 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가보지 않은 곳이 없고 안 해본 일이 없었기에 그랬던 거 같다.
내가 태어난 날은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무지 작은 아이가 지 어미가 땀까지 흘려가며 나를 세상에 보냈다고 한다. 갓난 아기인 나를 본 엄만 너무도 초라한 나를 보며 저게 인간이 될까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셨는데 아버지도 어렸을 땐 무척 작았기 때문이다. 아버진 나를 아버지의 모든 것을 유전이라는 멍애라고 일찍이 아버지는 알고 계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뻥은 늘 재미가 있었는데 재미난 이야기는 현실에 맞았지만 때론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버지는 했었다. 그러니 엄마는 알아서 거리개로 불순물을 거르듯 거른 후 믿게 되었다. 엄마가 아버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계기가 있었으니 아버지는 군대를 면제를 받았었다. 무슨 이유로 그런진 잘 모르겠지만 아마 학교를 가지 못했다는 이유가 아닐까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지만 아버지의 소위 '뻥'이란 것이 꼬리가 길면 밝히는 법. 하나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느는 법 아버지의 뻥이라고 위장을 했지만 진실이 아니기에 아버지의 말은 대개가 거짓말이었다. 근거가 있는 거짓말 하지만 아버지의 뻥이란 것이 너무 심할 정도였다. 엄마는 아버지가 미워질 때 옛 얘기를 하신다. 아버지가 논이 몇 마지가 되고 밭도 있다고 다 지나간 과거를 다시 꺼 집어내며 지난날을 아쉬워하며 말할 때가 있다. 그러면 아버지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한 풀 기가 꺾인다. 군대는 문턱에도 가지 않았으나 갔다온 사람보다 더 실감나게 상황묘사를 하신다. 난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가 군엘 갔다온 줄 알았었다.
다시 돌아가서 아버지는 대구로 올 수밖에 없었는데 나의 이모뻘 대는 사람이 임천-내가 태어난 곳-으로 오셨다. 오게된 이유는 동생이 잘 사는지 더구나 사돈댁으로 갔기 때문에 사돈과 인사도 할 겸해서 부여로 다시 임천으로 왔는데 이모가 당시 우리 집을 봤다. 그리고 엄마의 애욕살이를 하는 모습에 기가 막혀 한숨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이러다 애 굶겨 죽이겠다며 태어난지 얼마 안된 나를 보고는 당장 대구로 가길 원했다. 엄마에게도 잘 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구로 내려온 아버지는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들어간 곳이 벽돌공장이었다. 아버지는 벽돌을 만드는 공장에 있어도 보고, 기계 공장에서도 있었다. 내가 그 중에서도 생각나는 것은 아버지가 공장의 쓰지 않는 빈터를 공장장과 사장에게 말을 하여 빌리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 터에 배추를 심었는데 그 밭은 옆에 개울을 끼고 있었다. 그 개울은 결국 금호강으로 흘러가는 것이겠지만서도 아버지와 엄마가 밭을 개간하고 있으면 나는 배추잎에 붙은 작은 청개구리를 잡고 놀기도 했고 있었다. 그때 우리 집은 복현동에서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아버지의 공장의 빈터의 배추밭은 개울이 있어 물이 풍족했는데 어린 나는 개울에서 개구리를 많이도 잡았었는데 개구리를 잡는 방법이 황당했다고 볼 수 있었다. 개구리는 눈 앞에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으면 잡아버리는 성질이 있는데 개울 주위에 기다란 버들강아지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그 강아지 풀 끝에다 침을 캭 뱉는다. 그러곤 개구리가 있는 개울 위에서 흔들기만 하면 개구리가 폴짝 뛰어 강아지풀을 잡는다. 떨떨한 개구리는 자기가 잡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으나 사실 잡는 것이다. 멍청한 개구리 녀석들. 자주 깜빡 하는 사람을 까마귀고기를 먹었다고 하는데 에이 개구리 같은 녀석아 라고 말하면 어떨까. 앞일과 곧 벌어질 뒷일을 생각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아버진 공장에서 사고를 당하셨다. 사고라고 쓰는 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다친 것을 사고라고 말하니 아버지는 엄살이 무척 심함을 알 수 있지만 이렇게 표현하는 나도 엄살이 무척 심하다. 부전자전이지 뭐.
또 아버지는 어린 아이를 좋아했는데 내가 어렸을 때 이뻐 죽겠다며 내 목을 잡고 서울구경을 시켜주셨는데 내 목을 들고서 말이다. 당시 사회는 건축 붐이 일고 있었는데 아버지도 돈을 따라 미장일을 배우셨다. 아버지가 미장일을 배우고서 한참 해외 연수 붐이 일을 때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외국으로 돈벌러 가심을 느끼지 못했었다. 가끔 엄마가 편지를 하라고 하셔서 편지도 붙였고 받았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갑자기 우리 집의 형편이 나아지지는 못했다. 대신 자신감이 아버지를 감싸고 있었을 뿐이었다. 귀국한 아버지는 여기저기서 일을 맡아 했었는데 돈이 제법 들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제법 두둑한 돈을 집으로 가지고 올 때가 많았다. 그러면 엄마는 좋아했고 밥상의 메뉴가 평소보다 보이지 않던 고기반찬이나 국이 올라오곤 했었다.

[ 썰매 ]
복현동에 셋방을 살고 있을 때에 아버지(그땐 아빠라고 불렀었다.)가 서너 살 된 나를 위해서, 다른 아이들에게서 따돌림을 받지 않기 위해 추운 겨울날에 썰매를 만들어 주셨다. 당시 우리동네에는 경대(경북대학교)와 맞붙은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땐 작은 문이 있었다.-어디에든 규모가 큰 건물엔 문이 여럿있었다- 그 문을 통해 대학생들도 오가고를 했었다. 그 문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그 웅덩이는 여름과 가을에는 잠자리를 잡기도 하고 물벌레를 잡기도 하던 곳이었다. 겨울이 되자 그 웅덩이는 물이 투명하고 딱딱하게 변신했다. 아버지가 쓰지 못하는 의자의 다리로 썰매를 만들어 주셨다. 그렇게 만든 썰매는 먼저 아버지가 연탄 불 위에 의자 다리를 올려놓는다. 그러면 쇠파이프로 된 의자다리는 오징어처럼 흐물하게 된다. 그런 의자다리를 그것을 'ㄷ' 자 형태로 구부린 뒤 나무판에 붙이면 끝. 보기엔 볼품이 없었지만 나무판 위에 양반자세로 앉아도 워낙 컸기 때문에 안정성이 뛰어났다. 아버지가 그것을 만들어주고 웅덩이에서 타고 다녔었는데, 못을 박은 꼬챙이로 하도 찔러서 얼음 바닥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벌써 부서진 곳도 있어 물이 흥건한 곳도 있었지만 나는 미끄럼을 타듯 자연스럽게 그 위를 지나다녔다. 헤헤 이것쯤이야 하고 그러다 누군가 동촌으로 타러가자는 말을 들었다. 동촌은 금호강 줄기 가운데 대구를 옆으로 지나가는 강줄기 중 하나였다. 여름엔 수영을 즐기곤 했었는데 겨울엔 스케이트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도 무거운 썰매를 들고 동촌으로 향했는데 경대의 조그만 웅덩이보단 몇 배나 큰 빙판이었다. 누가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마침 빙판 밑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고기를 얼음을 깨서 끄집어내는 낚시 방법으로 고기를 잡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렇게 잡은 시장에 판다고 했다. 그런 낚시꾼을 옆으로 하며 강 위로 올라갔다. 반대편까지 약 백여미터 되었는데-어쩜 그 이상도- 난 아버지가 만들어준 썰매에 앉고 쇠꼬창이로 얼음 바닥을 쳐가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반대편에는 진짜 스케이트를 신발을 신은 사람이 보였다. 또 나처럼 썰매를 타는 아이들도 있었다. 스케이트보단 썰매를 타는 아이가 더 많았다. 그 아이들은 내 쪽으로 오기를 꺼려했는데 아마 강이 넓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그와 동시에 모험을 하고픈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내가 시범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강의 한 가운데로 향했는데 갈 때는 몰랐는데 되돌아 올때는 시껍을 먹었다. 한참을 놀다가 돌아오는데, 푸른 얼음 바닥을 즐겨보며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쩌적 하는 미세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였다. 한 줄기 식은 땀이 나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었다. 난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그래야만 얼음이 꺼지기 전에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강을 지나는 것을 본 강 건너편에 있던 아이들이 날 따러 오려했다. 난 썰매를 돌려 오지마 위험해 라고 외쳐야만 했다. 다행이 아이들은 오지를 않았는데 만약 에 날 따라 왔었다면 아마 죽었을 것이다.

[나 어렸을 적]
난 혼자 있기를 좋아했는데 이유는 뻔했다. 그럴 때면 상상을 잘 했었는데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전 날 텔레비전로 봤던 프로의 이야기나 어른들이 꾸며낸 사건 등을 편집을 해서 상상하기를 즐겨했다. 그러면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나 피터팬이 내가 될 수도 있곤 했다. 그래서 '악당을 쳐부수는 나' 이기를 생각했다. 그리고 난 물을 좋아한다. 물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때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쓰겠다. 난 지금은 대구에서 생활하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충남 부여였다. 그것도 차(버스)로도 한 참을 들어가야 하는 촌구석이었다. 그런 집에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활을 했었다. 내가 태어난 당시는 천 구백 칠십 년이었다. 난 모르지만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었다고 들었다. 그런 가운데 내가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는 식구가 먹을 쌀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봤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노동의 품삯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엔 부족했다. 아내는 불만을 토해냈고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큰아버지(형님)집에 쌀을 구하려 했으나 큰아버지는 빌려주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어떤 계획이 있었는지 모르나 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각한 것은 도둑질이었다. 장발장은 빵은 훔쳤다지만 아버지는 쌀을 훔쳐와야 했다. 그것도 형님 집에서 그러니 어머니가 제대로 먹었겠는가 아이는 배고프다고 울지 젖은 나오지 않지 그래서 급기야 물을 먹였다고 한다. 물을 먹는 아이는 울다가도 울음을 멈췄다고 그래서 어머니는 아이에게 물을 자주 먹였다고 이렇게 해서 내가 물을 자주 많이 먹게되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궁긍적 이유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
급기야 나의 이모뻘 대는 사람이 부여로 왔었다. 시집간 아이가 잘 사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집에 왔었다. 그러나 사는 형편을 보자 반 강제로 대구로 끌고 내려왔다. 그렇게 해서 난 대구 사람이 되었다.

[ 저, 버스가 내 집! ]
대구에서 내가 있던 집은 버스를 개조한 집이었다. 어떻게 해서 버스에서 생활하게 되었는지는 뻔했다. 임천에 있을 때에는 집이라도 있었지만 대구에서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누군가에서 들으셨겠지 일도 하고 집도 준다기에 오셨을 것이고 그렇게 와서 보니 버스가 집이었다. 버스가 집이라도 감사해야지 우리 집 옆은 또 다른 버스가 있었는데 그것 역시 집이었다. 마치 주차장을 방불할 정도였다. 그런 집들-주차장-은 벽돌로 둘러 쌓여 있었는데 그곳은 벽돌을 만들어내는 공장이었다. 벽돌을 만들기는 비교적 쉬웠는데 벽돌모양을 한 틀에다 시멘트와 굵은 모래를 약간 넣은 시멘트를 틀에다 넣고 기계로 꾸욱 누르면 완성이다. 내가 거기에 있었던 기억은 분명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당시 짐 자전거가 버스(우리 집)앞에 있었는데 아빠가 날 태워다 주곤 했었다. 거 있잖은가! 어린이를 태울 수 있게 작은 의자가 자전거 가운데 설치되어 있는 그런데 호기심 많은 내가 자전거를 보니 물고기의 주둥이처럼 생긴 것이 보였다. 그것은 브레이크를 핸들(손잡이)에 부착되어 있었는데 브레이크를 잡으면 아가미가 벌어지곤 했었다. 그 아가미가 입을 열고 있을 때 난 손가락으로 그 주둥이에 넣었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주둥이가 입을 다물자 난 눈에서 물이 울컥 쏟아냄과 동시에 으앙 울어버렸다. 참 어처구니없었던 추억이다. 그 것으로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은 없다. 내 머릿속에는 버스가 집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 뿐

[ 외갓집 ]
우리 집은 친척이 많지 않다. 아버지로선 형님이 사는 큰집뿐이며 그리고 고모 두 분이 계신다. 엄마로선 거의 없다. 형제? 있을지 모르나 왕래가 없어 소식이 없어졌다. 외할머니가 계셨는데 지금은 행방이 묘하지만 아마 돌아가셨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외갓집은 대구부근 경산이라는 곳에서도 한 참을 버스로 가야하고 역시 한 참을 걷고서야 있었는데 전원적인 시골집이었다. 외갓집 인근엔 크고 작은 저수지가 많았는데 외갓집도 마당을 거치고 싸리문을 열면 아담한 저수지가 있었다. 저수지 건너편에는 사과 과수원이 있었는데 외갓집을 갈 때마다 늘 푸짐했었다. 우리가 가면 할아버지는 저녁 특별 메뉴를 위해서 낚싯대를 가지고 나가시는데 내가 자주 졸졸 강아지 마냥 꼬리를 흔들며 따라갔었는데 할아버지는 옆집으로 가시는 것이었다. 옆집은 소를 많이 키우는데 큰 외양간 곁으로 걷다보면 소는 코가 항상 번들거렸는데 난 소똥을 피해가며 할아버지를 따랐었다. 할아버지가 간 곳은 보통 교실 만한 크기의 연못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언제 준비하셨는지 할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통발에 된장을 넣어 물고기를 유인해서 잡는다. 그렇게 잡은 작은 고기로 저어 멀리 있는 큰 저수지로 향한다. 나도 거기까지 따라갔었는데 왠지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할아버지는 맥가이버 뺨을 칠정도로 손재주가 있었는데 그 흔한 아카시아 나무를 낚싯대 삼아 잡은 고기를 미끼로 써서 저수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난 물 밖에서 구경만 해야했는데 할아버지는 그 낚싯대를 저수지에다 꽂아 놓고는 밖으로 나오셨다. 그리곤 집으로 향했는데 난 할아버지 저렇게 놔두면 돼나요? 라며 묻곤 했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저렇게 해두고 조금 있다가 와보면 된다고 하셨다. 빈손으로 올 때도 있지만 그 날은 외손자에게 체면이 세워졌다. 그 날 나는 물고기를 반찬으로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나의 발에는 외갓집에서 내게 준 흔적이 있지만 거기에 대한 난 기억은 없다. 그 흔적은 내가 물을 많이 먹는다고 어디에서 들었는 것을 내게 행하셨는데 어디 누군가가 발에다 뜸을 들이면 될거란 말에 내게 행하셨다고 들었다. 그래서 외갓집에 가면 '저 종내기는 아직도 물을 묵나' 라고 말하셔서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셨다. 지금 경산에 갈 일이 없다. 외갓집은 누군가에게 팔렸기 때문이다. 내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외갓집의 감나무였다. 할아버지가 복숭아 나무와 젖붙여서 만든 나무였다. 가을에 감이 익을 때면 할아버지는 긴 대나무 장대로 장대 끝을 손가락 모양으로 쪼게 놓고선 감을 장대의 손가락에 걸고선 획 비틀면 감은 나무와 생이별을 해야하고 결국엔 내 입으로 가는 것이지만^_^ 감은 그 동네에선 그 모양이 유별났고 맛 또한 일품이었다. 모양은 TV에서 디즈니 만화로 봐온 샌드위치 모양이었다. 어찌나 큰지. 난 이 글을 쓰며 입안에 침이 가득함을 느낀다.
외갓집엔 또 내가 갈 때마다 먹을 것이 풍부했다. 여름(가을이었나 분명한 건 더운 날씨였다)엔 입 안에서 상큼한 맛을 지닌 청포도는 외갓집에서 싸리문을 열면 할머니가 만드신 밭이 조그맣게 있었다. 그리고 마을입구에는 거대한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 과수원은 자두를 주 생산하고 있었다. 자두 하나의 크기가 내 손바닥을 쫙 펴도 잡기가 힘들었다. 자두는 할머니가 사셔야 했다. 대신 아주 헐값에 바가지에 가득 담아 오셨다. 얼마나 시고 달던지 그런데 시내나 시장에선 그런 큰 자두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 까? 외갓집은 도시의 내가 시골이나 전원적 분위기를 자아낼 때 늘 떠오르던 곳이 되었다. 가고 싶지만 가본들 할머니 할아버지는 계시지 않으신다. 이사를 가셨거나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때가 정말 그립다.

[ 큰 집 ]
하지만 명절에 큰집 부여 임천으로 간다. 외갓집에선 낚시를 즐겨하시는 할아버지와 내게 욕 같은 말을 하시는 할머니가 있었고 더불어 재미도 있었지만 임천 큰집엔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었다. 추석 때 면 큰집엘 가는데 난 버스를 타는 것이 좋아했다. 그러나 엄만 그렇지 못했었다. 버스만 타면 구역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난 버스 타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넘쳤는데 아마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기대가 있었나 보였다.
터미널까지 걸어가고, 미리 예약을 했으나 기다란 줄의 맨 뒤로 가야했고 표를 받고서 고속버스에 타면 우선 절반은 갔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명절에 고속버스 타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고속버스는 대전에서 멈췄고 다시 부여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작은 시외 터미널을 통해 부여로 가야했다. 엄마는 대전에서도 부여에서도 구역질을 했다. 부여까지만 왔어도 90%갔는 거였다. 다시 임천면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야한다. 멀미를 달고 다니는 엄마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시골이라면 왠지 마음에 그리는 것이 있었다. 과일을 실컷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나의 기대일 뿐 실제는 그러지 못했다. 당시 큰집에는 담배를 재배하고 있었는데 추석 때여서 담배재배에 온 신경을 써야했기에 우리 집 가족이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그 이유는 일군이 모자라던 판에 일군이 생겼기 때문이다. 늘 큰집엘 가면 담배농사를 도와야 했다. 그런 가운데 저녁 밥상 앞에선 모두 밥상 앞에 모였다. 나의 형과 누나가 있었고 내 밑에 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그런데 문득 형이 면에 가야할 일이 있다고 했다. 난 시골의 경치를 구경하고픈 호기심에서 같이 가자고 했다. 형은 그러자고 말했고 난 시장에서 엄마를 따라 다니는 것처럼 형을 따라나섰다. 형은 커다란 자전거를 타고 갔었는데 그 날은 짐 하나를 가져가야 했다. 바로 날 데리고 가야했기 때문이다. 면은 집에서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갈 적엔 재미를 기대하기도 했고 내리막이라 쏜살 같이 내려왔기 때문에 느끼지 못했었다. 해가 저 산 뒤로 모습을 감추자 고즈넉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형은 일을 빨리 처리하고 다시 어린 동생을 데리고 내리막길이 아닌 오르막길을 거꾸로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여간 힘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형으로서 체면이 있지 형은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힘겹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려갈 땐 느끼지 못했는데 올라가려니 형이 내려온 길은 온통 자갈밭이었다. 그 자갈길을 자전거 뒤에 날 태우고서 가야했으니 그런데 뒤에 앉은 난 자전거 바퀴가 자갈을 밝고 지나갈 때면 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가장 중요한 부분도 아파왔다. 참을성이 없는 나는 '아이고 불알 떨어지네 불알 떨어져' 라고 소리를 질렀으니 경상도의 빠른 사투리와 충청도의 느린 말투의 분위기로선 빠른 경상도 사투리가 내 말을 알아듣지를 못했었다가 차츰 알아듣자 얼마나 웃던지 결국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참 신은 이상도 하다. 남자에게는 여자에게는 없는 걸기적거리는 불알을 만들었을 까

[ 복현동에서 ]
우리가 세 살던 집은 경북대학교 (이하 경대)밑에 위치하고 있었다. 경대는 어린 나에겐 하나의 놀이터였다. 덩치가 큰. 어찌나 큰지 경대 안에는 논이 있었고 과수원도 있었다. 난 경대가 발전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에 속한다. 내가 어렸을 때 경대 법대건물 쪽에 작은 터전이 있었는데 그 장소는 연인들의 은밀한 장소이기도 했었다. 암튼 내가 어렸을 때 그 장소는 내가 학교에서 찰흙을 가져오라고 지시를 받으면 거기서 흙을 채취하곤 했었다. 그러다 친구들의 몫까지 챙길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나는 흙을 잔뜩 퍼서 학교로 나르곤 했었다. 그렇게 흙을 퍼다가 집으로 가져가면 엄만 날 나무라셨다. '니 꼬라지가 그게 뭐꼬 흙바닥에서 씨름했나 아구 못산다 니 땜에 못산다' 내 옷에 묻은 흙 때문이다. 내 옷을 대야에 넣고 엄만 빨으셨다. 그러면 누런 흙탕물이 대야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곤 수채로 흘러갔다.

경대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크나큰 아카시아 나무가 우뚝 서 있었는데 3∼4월 쯤엔 아카시아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고 너무 높이 달려있어서 내겐 꿈에 불과했지만 키 작은 아카시아 나무가 있어 그리로 갈 수밖에 그러다 키 작은 아카시아 나무를 발견하면 단물을 잔뜩 사리고 있던 꽃을 따다가 으그적 씹으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경대엔 운동장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 중 작은 운동장이 우리 집 가까이 있었다. 경대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 아니 우리의 독무대였다. 특히 작은 운동장은 키 작은 나무-아마 히말라야 시다인 것 같다-가 일렬로 주욱 있었는데 난 나무에 올라가 잔 가지들로 이리당기고 저리 밀어서 일종의 아지트를 만들었는데 나만의 공간이었다. 친구들도 내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운동장에는 키 작은 잡초가 이끼처럼 무성했는데 내 아지트 주변으로 잡초를 엮어 사람이 넘어지게 만들곤 했었다. 그 자리에서 넘어진 사람은 그곳 대학생뿐이었다. 운동장의 곁엔 농대학생들의 실습장도 있었는데 그 곳은 딸기가 남모르게 숨어서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극성스러운 우리들은 쉽게 딸기를 찾았었고 그 딸기는 우리의 먹거리로 사용되고 말았다.
운동장 주변 학교에서 울타리 구실로 찔레를 심었는데 그 찔레조차 우리의 간식거리가 되었었다. 찔레나무의 꼭대기 부분엔 가지가 연했는데 그걸 따서 가지의 껍질을 벗겨내면 새하얀 속살이 있는데 그걸 먹으면 흥건한 물과 독특한 맛이 일품이었다. 아 먹고 싶어라
운동장 입구 근처엔 바로 옆에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다. 그리고 과수원 밑에는 꽤 큰 논이 있었고 그 논은 복현동 주민이 일구는 것이었다. 그 논과 운동장 앞에는 키만 큰 나무가 있었는데 아무런 열매가 없었던 나무였다. 솔직히 나무라고 해야할지 풀이라고 해야할지 헷갈리지만 풀은 땅바닥에 붙어 있지만 그건 하늘로 키를 자랑하곤 했었기 때문에 나무라고 하겠다. 내가 누군가 그 빼빼 마른 나무를 뽑아버리고 말았다. 일종의 화풀이를 하려고 했듯이 그러나 그 나무의 뿌리엔 토실토실한 고구마 같은 것이 많았다. 우린 당연히 그것도 먹을 수 있으리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우린 그것을 돼지감자라고 불렀는데 그것을 흙을 털어내고, 닦으면 노란 몸체를 드러낸다. 우린 그것을 먹었었다. 맛? 고구마 같이 타박타박했고 물기를 잔뜩 품고 있어서 그 독특한 맛이라니 잊지 못한다.
또 여름엔 비가 억수같이 내렸는데 난 비가와도 걱정이 없었다. 이유는 비가 오면 경대 논에 물이 찰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미꾸라지가 물 속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날이 개면 그러니까 비가 그치면 난 밖으로 나갔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친구들이 모이면 경대로 갔었다. 한 송엔 소쿠리를 들고서. 소쿠리는 미꾸라지를 잡는 도구였다. 어린 우리에게 물고기를 잡는 반도가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미꾸라지를 발견하면 소쿠리로 뜨면 되는 것이었다. 난 소쿠리를 들고 경대의 논밭을 배회했었는데 미꾸라지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수채에서 미꾸라지가 수 십 마리가 노니는 것을 보았었다. 더러운 수채라 할지라도 호기심 많은 나는 신발을 벗어 던지고 들어갔다. 날씨는 무더운 여름이어서, 그리고 비가 온 뒤여서 수채라 하더라도 물은 맑았었다. 그렇게라도 난 미꾸라지에 애착이 남달랐다. 우습지만 그 땐 그랬다.
미꾸라지가 아니라 물고기를 잡고 싶으면 난 경대 '지도못'으로 향했는데 경대 안에는 여러개의 연못이 있다. 본관 앞 꽃시계 옆엔 무궁화모양의 분수대가 있는 연못이 있었고 그곳에도 생물이 살았었다. 민물장어. 난 그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모른다. 뱀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새우들 또 엄청나게 많았고 또 덩치가 큰 비단잉어가 그 분수대가 있는 연못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연못 주변엔 늘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거기서 학생회관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또 기다란 못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지도못이다. 그 못엔 제주도를 상징하는 것은 없다. 우습게도 대구의 위치엔 분수가 있었다. 그 연못의 압록강 위치엔 물이 빠져나가게 만들어 있었는데 아마 지도못 어딘가에 물이 솟고 있었는 것 같다. 그 압록강 변엔 하수도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리로 물고기가 넘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도 자주 같은 집에 사는 주인집형이 그 하수도에서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나는 구경만 했다. 왜냐고 묻지 마시라 키가 작은 것이 분할 따름이다.^_^
한번은 긴 장마가 우리를 덮쳤는데 마침 논에는 나락이 없었다. 모두 추수했기 때문이다. 추수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는데 아마 농기구가 부족하고 없던 시기였던 지라 모두 수 작업을 했을 것이다고 생각할 뿐이다. 장마가 지나가면 논은 온통 누런 바다였다. 비가 작게 내릴 때면 신발만 조심하면 버리지 않았으나 장마가 지면 옷을 허리까지 올리고 논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날은 온 동네 사람이 모두 나왔다. 모두 미꾸라지를 잡을 생각으로 소쿠리를 들고서 소쿠리 크기도 천차만별했었다. 마침 내가 논 둑에서 내려다보니 미꾸라지가 뱀처럼 엉켜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짝짓기를 하는 도중이었을 것이다만 난 혹시 뱀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머리 한쪽으로 치우고 미꾸라지를 잡으려는 생각으로 소쿠리를 날렸다. 그랬더니 완전히 횅재를 한 것이다. 한꺼번에 두 마리를 잡았으니 난 그 미꾸라지 한 마리를 커다란 병에 넣었다. 금붕어처럼 키워볼 생각으로 다른 집에선 추어탕을 만들고 있겠지만 난 왠지 기르고 싶었다. 크고 굵은 놈을 소주 큰 병에 넣었다. 병이라곤 그것뿐이었으므로 그렇게 넣고선 난 학교로 가고 오는 평범한 생활을 했다. 그런데 소주 대 병에 넣어두었던 미꾸라지 곁에 꼭 쌀 한 톨이 보이는 것이었다. '엄마 밥짓다가 쌀을 떨어트렸어요' 라고 물어봤지만 아니라고 엄마는 말했다. 아니 그러면 저건 알! ! ! 첨에 그렇게 생각했다. 알이라고 말도 안 되지 하지만 어린 내가 보기엔 참 신기했다. 그것을 버렸는지 기억은 없다.
겨울 썰매를 타다가 꽈당 얼음 바닥에 넘어졌었는데 그렇게 넘어지면 옷은 물론이고 운동화까지 버리기가 일쑤였다. 그것도 더러운 수채에 빠져서 수채를 넘으려다 한 발이 빠진 것이다. 엄마에게 혼이 안 나려면 신발을 말려야 했다. 그래서 어찌어찌해서 불을 지피고 신발을 불 위로 들고 있었다. 빨리 마르리란 소망을 가지고 그런데 엄마야 신발이 불 기운으로 고무로 만든 신발이 물렁물렁 해지더니 급기야 타기 시작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매타작을 받아야 했다. 어처구니없는 장면으로 기억의 저편으로 던져졌다.
학교에서 폐품수집이 있었다. 친구들은 마지못해 못쓰는 그릇을 가져왔었지만 나는 경대로 가면 언제나 캠퍼스에 콜라병이 있었다. 난 자주 콜라병을 가지고 엿과 바꿔먹었는데 엄만 그것으로 가게에서 돈과 바꿨었다. 그땐 돈이 중했기에.
난 그 콜라병을 폐품으로 제출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말고도 자판기에서 캔을 모아 팔기도 했었는데 나에겐 짭잘한 수입이 되기도 했었다. 가끔 큰방 그러니깐 난 셋방 주인집의 형과 자주 돌아다녔는데 형은 쓰레기장으로 날 데려가곤 했었는데 더러운 쓰레기장에 간 이유는 돈을 줍기 위해서였다. 쓰레기장 가운데 작은 웅덩이가 있었는데 그 웅덩이 바닥엔 십원짜리 동전이 수북이 있었다. 하루 종일 설쳐대면 백 원을 얻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돈이 쉽게 번다면 좋겠지만 그 웅덩이에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가 헤엄치고 있었는데 키 큰 형이 들어갔다 나오면 거머리가 형의 다리에 붙곤 했었다. 거머리를 형의 다리에서 떼는 것도 쉽지 않았었다. 거머리는 거머리였다. 한 번 붙었다하면 제 몸이 끊어지더라도 빨판으로 철 석 붙어 떼어내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성경에 나오는 삼손이 와서도 떼어내진 못했으리라 그렇게 해서 주운 돈이 기껏 합쳐봐야 오십 원! 백 원도 안 되었다. 그래도 형은 좋아라하고선 그 돈으로 아이스깨끼로 바꿨다. 난 형이 조금 떼어주면 만족해하며 받아먹었고 그땐 내가 참 등신이었다.

[ 야호 썰매다! ]
몇 년이 흐르고 쌀쌀한 바람이 대지를 덮는 날 우리가족은 설을 지내기 위해서 큰집으로 가기 위해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을 통해 저어 산의 어깨에나 이마엔 무거워 보이는 하얀 쌀밥이 김을 모락모락 뿜어내며 있었다. 대구에선 눈을 구경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기에 난 그저 신기해하며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기에서 신나게 내려와 봤으면 내가 스키를 타고 영화 007제임스본드 마냥 높은 산에서 요리조리 나무들을 피해가며 산을 내려오는 그런 주인공이 나였으면 하는.
고향에 도착했다. 확실히 눈이 제법 쌓여있었다. 여긴 도시의 뜨거운 열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제사상에서 큰절을 하고 밥을 후딱 먹고 대충 무난히 마쳤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묘는 집 아래 있어 간단했지만 할머니 묘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껜 아내가 두 명이었는데 출산의 문제가 있었나 보였다. 할머니에 관해 선 별 기억이 없는 관계로 생략한다. 할머니의 묘는 정산이라는 곳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 제사를 마치고 온 식구들은 정산으로 향했다. 정산엔 그 옛날 외갓집 같은 분위기였다. 사람이 내리고 버스에 타던 버스 정류장이 없다. 내리고 싶으면 미리 운전사에게 말만하면 되는 것이었다. 난 초행길이라 누나를 엄마처럼 따랐다. 내겐 형이 있고 누나와 두 남동생이 있었다. 누나는 장구를 잘 연주했는데 손재주가 있었다.-그런 면에선 누나 역시 문씨였다- 그런 누나를 따라 버스에서 내린 곳은 주변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었다. 다만 보이는 것이라곤 사람이 자주 다녀 만들어진 길 뿐. 그 길을 따라 내린 눈을 뽀드득 뽀드득 소리나게 밟으며 한 참을 걸었다. 고개에 올라서니 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래로 쭉 뻗어있었고 눈으로 포근하게 이불을 한 논이 보였다. 논이 있으면 가까이 민가가 있다는 뜻 우린 정산 큰집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곧 집에 도착할 거란 기대를 걸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고 하얗게 눈으로 덮인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정산 큰집에는 여자만 수두룩했는데 남자도 있었다. 내겐 모두 형이었다. 나는 서먹해서 그냥 서 있었는데 큰아버지란 분이 내 손을 잡으며 "대구에서 예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춥쟈? 얼른 방으로 들어오너라." 부엌에선 아낙네들의 손길이 바쁘고 구수한 잡담이 풍성했다. 부엌의 한 쪽 귀틈이에는 장작과 삭정이가 아궁이에 들어갈 순서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방에선 아침상이 나 아니 온 식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고모네 식구들 임천 큰집 식구들과 정산 큰집 식구들 모두들 한 자리에서 아침밥을 먹는 다는 건 정산 큰집에선 큰 행사였고 기쁜 일이었다. 혈연血緣이란 것이 말이 없어도 함께 함으로 정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인 것이었다.
누군가 '눈을 타러 가자'고 말을 했고 즉시 모두-어른은 제외-가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 침침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산 큰집의 막내가 우릴 안내했었는데 우리가 안내되어 간 곳은 더러움과 울퉁불퉁함을 감추어버린 아주 긴 내리막이었다. 갈 때 각자는 비료포대를 가지고 갔었는데 비료포대는 각자가 내리막을 수식간에 타고 내려올 썰매였다.
자신만만한 임천의 내 동생이 먼저 시범을 보였는데 어찌나 빨리 내려갔는지 신이 나 보였다. 그런데 쭈욱 먼저 내려간 동생은 다시 힘겹게 걸어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때 동생의 모습은 먼저 했다는 자신감이 온몸에 묻어나 있었다. 나도 비료포대 위에 앉고 밑으로 내려갔다. 쏜살을 타고 내려오니 바람이 나를 훝고 지나갔다. 그때의 짜릿함이라니


[ 마귀야 물러가라 ]
대구에서 복현동이란 동네에 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내가 물을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걱정하신 부모님은 이웃 사람들이 '저건 귀신이 붙었기 때문에 저런 거야 교회에선 귀신을 쫒아 낸다고 카드라' 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부모님은 아이를 고쳐볼 생각으로 교회로 날 데려갔다. 교회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었다. 늦은 밤 교회는 전도사가 지키고 있었다. 아니 상주했다는 표현이 좋을지 모르겠다. 부모님이 간단하게 교회에 오게된 이유를 말하자 날 내려다보며 하는 말 '이 아이에게 마귀가 세 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제가 쫒아내 드릴테니 우선 여기에 아이를 눕히세요, 여기 앉으세요.' 그리곤 내 배에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다. 난 아프다고 말하면 그는 '이놈 마귀야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썩 나오너라.' 참 기가 막힌 노릇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고 하겠지만 그때 부모님은 진지했다.
하루는 동전이 무슨 장난으로였는지 모르나 내 입으로 들어갔다. 아마 내가 장난삼아 먹었던 것 같다. 돈은 변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 목에서 걸려 하늘이 노래지고 숨이 턱턱 막혔다. 인간의 신체는 식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밥을 먹으면 식도 역활을 한다. 또 공기를 들이쉬면 식도는 위가 아닌 폐와 연결된다. 엄마와 아빠는 병원으로 갈려고 했으나 마침 이웃집 어른이 이런 우리 집을 보고 아이를 거꾸로 들고 털으라고 말했다. 힘 센 아버지가 날 거꾸로 들자 난 곧 바로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입에서 나온 것은 피로 코팅된 동전이었다. 난 한마터면 죽을 뻔한 것이었다..

[ 참 집 ]
기억이 가묻가묻 하지만 아빠가 미장일을 하실 때 우리 집은 돈을 벌기 위해 공사현장에 참 집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일 때우리 집은 대구 파티마 병원 가까이 단독 주택의 지하실에 있었는데 그때가 아마 참 집의 처음이었을 것이다. 겉으론 단독주택이었지만 난 바깥으로 출입을 했었다. 그렇게 해서 돈을 약간 모았었던 우리 집
또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아마 5학년 때라고 짐작한다. 그땐 우리 집은 참 집으로 염색공단에 있었다. 아마 공장을 신축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은 그 공장과 가까이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참 눈이 엄청 내렸었다. 난 동생과 눈싸움을, 썰매를 만들어 놀았었다. 그땐 즐거웠는데 어느 날 염색 공장에서 물이 배출이 잘 안 된다고 참 집의 주인인 아빠에게 말했나 보였다. 아빠는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면 거절을 못하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다. 아빠는 공장의 문제는 하수도에 있다고 생각해서 우리 집 옆의 하수도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찌꺼기를 꺼냈다. 그러자 하수도는 저절로 고쳐졌는데 아빠는 그것을 자랑하고 싶었나 보였다. 그래서 하수도 뚜껑을 닫지 않고 있었다. 그게 문제가 될 줄이야 그땐 몰랐었다. 그땐 겨울이었다. 찬 바람과 눈이 소복이 쌓여가고 있었지만 하수도 부근엔 눈이 쌓이지 못했다. 이유는 염색할 때에는 여러 색소를 혼합하는데 차가운 물 보다는 뜨거운 물에 혼합이 더 잘되었기 때문이고 결국 하수도로 배출되는 물은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이었다. 내가 심심해서 동생과 나 잡아봐라 하며 놀고 있었는데 난 뒤로 걸으며 동생을 유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땅 속으로 떨어졌다. 아빠가 뚜껑을 닫지 않은 하수도였다. 하지만 난 물에 빠지지 않았다. 나의 다리는 난 넓고 큰 하수도에 떨어졌지만 내 팔 한 손으로 하수도에 박힌 철제 사다리를 잡았다. 그러나 몸의 반은 뜨거운 물에 삶기고 있었다. 아빠와 아저씨들이 날 꺼냈는데 난 엄청 서럽게 울었다. 지금은 그때의 흔적이 나의 턱에 남아 있지만 생각도 하기 싫고 기억도 하기 싫다. 난 죽다가 살아났다.

[ 초등학교 ]
난 국민학교 다시 말해 초등학교를 몇 번 옮겨야 했다. 전학이 아니었고 학교가 새로 생겼을 때 인근 학교에서 새 학교와 가까이 있는 학생을 상대로 그렇게 옮기라고 했다. 내가 처음 다닌 학교는 동부학교였고, 키가 무척 작았는데 키는 작지 몸은 약했지 더구나 나의 헤어스타일이 아줌마 머리 즉 곱슬머리인데다 오똑한 코 때문에 날 동남아 출신의 아이로 많이들 오해를 받곤 했다. 그래서 내 초등학생 시절 별명은 '라면머리'였다. 동부학교에서 5학년에서 아니 6학년 다닐 때 복현동에 위치한 복현 초등학교로 강제 이주를 해야만 했다.
내가 학교를 가기 위해 걸어서 메리산을 넘어야 했는데 메리산은 작은 언덕 같았기 때문에 수월하게 넘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메리산에 있는 집에서 젖소가 있었는데 아저씨가 젖을 짜고 있었다. 그 모습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날 보더니 먹어보라며 방금 짠 우유를 내게 주는 것이었다. 그때 마셔본 우유를 지금도 잊을 수 없는데 기가 막힐 정도의 맛이었다. 정말 낫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론 우유를 마셔보지 못했었다. 지금의 난 우유를 먹지 못한다.
키 작은 학생인 나는 친한 친구와 자주 같이 어울려 놀았는데 6학년 시절 나의 담임 선생님은 지독한 선생님이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나와 친한 친구들 모두 선생님에게 눈밖에 나서 늘 화장실 청소는 우리가 도맡아 했으며 더구나 선생님은 학교 배구부 코치이기도 했는데 우리를 배구공 볼 보이를 시키셨다. 난 선생님께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쌓여있었다. 한 번은 선생님이 과학적으로 얘기를 하시다 물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물의 분자구조는 H O에서 였는데 이때 O는 산소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물에 빠져도 숨을 쉴 수 있다. 그땐 선생님의 말은 곧 진리라고 생각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믿었다. 병신같이 그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왜생기나 그땐 그렇게 따져보지도 못하고 말이다.
교실에는 학급문고라고 크지 않는 책장이 있었는데 점심시간이면 난 거기서 책을 꺼내 읽곤 했었다. 난 소설을 좋아했는데 이십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소설을 좋아하며 지금은 소설가를 꿈꾼다. 점심시간 친구들이 나를 찾기는 쉬웠다. 난 항상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것은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없어진 것이다. 선생님은 범인이 나라고 생각했나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항상 책을 읽었으니 말이다. 심정은 날 범인으로 꼽고 있었지만 물증이 없으니 단체로 벌을 줄 수밖에. 우리 반에 처녀 같은 친구가 있었다. 그 애의 집은 조그만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애의 엄마가 학교로 올라치면 늘 푸짐한 과일이나 음료수를 가져오곤 했다. 그래서 일까 선생님은 유독 그 아이를 감싼 것 같았다. 그 애의 가슴은 엄마의 그것과 비슷했는데 그 정도로 컸다. 그래서 학교 운동회가 있을 때면 모든 아이들이 뛰어야 했지만 만약 그 애가 뛴다고 생각해 보라 뛰면서 권투글러브 같은 가슴이 흔들거리고 있다고 다른 여자아이들은 백 미터 달리기에 참가해야 했지만 그 아인 열외列外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난 선생님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곧 결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졸업식이 그것이었다. 졸업식 때 몇 몇 여자 애들이 눈물을 닦고 있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고 있는 것이었다. 난 학교를 졸업하자 난 뛸 듯이 기뻤다. 저 꼴보기 싫은 선생을 만나지 않아서 말이다. 그때 받은 앨범엔 나의 분노가 담겨져 있다. 내가 그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는 장면은 모두 가위로 오려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나는 분이 삭지 못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그때도 우리 집은 복현동에 있었는데 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걸어서 다녔다. 중학교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옆에 있었기 때문이고 고등학교는 거리는 조금 멀었지만 그렇다고 버스를 타기에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난 아래동네에서 만대이로 이사했는데 여기서 만대이는 방향상 위를 가리키는데 난 윗동네로 이사한 것이다. 키도 작지 덩치도 없지 여자아이들이 날 놀렸었는데 언젠가 내가 바빠서 도복을 입고서 태권도장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걸 여자애가 본 모양이었다.
귀여운 여자아이가 우리 집으로 오더니 '오빠, 태권도 배워?'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 동생은 '그럼 오빠는 태권도 자알 한다.' 그 애는 믿지 못하겠던지 시범을 보여달라고 동생에게 말했고 난 그 자리에서 옆차기를 보여줬다. 그래도 못 믿겠던지 집에까지 찾아왔다. 거기서부턴 내 방이 있었는데 내가 배개를 가슴에 안고 있으라고 하고선 내가 옆차기로 그 애의 가슴에 있는 배개를 찼다. 그런데 그 애는 뒤로 자빠졌는데 하필 그때 부모님이 저녁을 드시고 있었다. 그 애는 배개를 안고 밥상에 떨어진 것이다. 그 후론 날 깔보지 못했는데 동네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가 그 애가 나타났다. 오빠 이 책 한번 읽어봐라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책은 내가 6학년 때 반에서 잃어버린 책이었다. 결국은 범인은 그 가슴이 큰 애였다. 분통이 터졌지만 이미 지난 일 어쩌랴 하여튼 못된 계집아이였다.
내가 중학교에 갔으나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티브에서 보던 꾸역꾸역 등교시간에 맞추려고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를 타고 등교한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걸어서 갔었기 때문이다. 내가 3년을 선생님들과 엉켜있어야 할 중학교는 6년 아니 학교이전 문제로 2년을 보내었던 초등학교의 옆에 중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난 변함없이 걸으며 다녀야 했다. 첫 수업시간에 난 초등학교 때 쓰던 가방을 여전히 쓰고 있었는데 과목마다 선생님이 다르다는 것에 놀랐었고 난 연필을 필통에서 꺼내 사용했지만 친구들은 볼펜을 사용함에 놀랐었다. 담임 선생님은 여자 선생님이셨다. 과학을 맡으신. 생물시간에 선생님이 성교육을 해주셨는데 선생님은 남자의 정자가 여자의 난자와 만나야 비로소 생명이 움트는 거야 선생님의 그 말씀에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었는데 착실한 난 손을 버쩍 들었다. '샘님, 샘님 말은 잘 알아 듣겠는데예 어떻게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왜 가만히 있는 정자가 가만히 있는 난자와 만나는 겁니까' 우리 반은 갑자기 내 말이 무슨 웃음 폭탄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웃음이 터졌다. 선생님은 나의 순진함에 말씀을 안 하시고 교무실로 가버렸다. 선생님이 가시자 친구들이 나를 둘러싸고는 '니는 그것도 모르나 하여튼 문제있데이 닌 앞으로 문제라고 부른란다 알았나 문제야' 라고 문제란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내 이름을 가지고 농을 거는 거였다. 그렇게 순진하던 내가 2학년에 올라가 좀 논다는 친구와 친하게 지냈었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시간에 그 친구는 잡지 같은 책을 옷 속으로 숨기고선 청소가 거의 끝나갈 때 화장실에서 그 책을 보여줬다. 책 속에는 알몸의 여자가 그곳을 자랑하려는 것처럼 떠억 벌리고 입은 웃으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서양 여자였는데 늘씬한 몸매에 다소 과장 섞인 가슴과 축축해 보이는 그곳. 난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들이었고 충격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눈을 감으나 뜨나 벗은 여자의 모습의 환상이 보였다. 그러니 나의 말초신경이 작동했었고 하루 밤을 자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었다. 난 여자의 그곳은 어떤 곳일까 어떤 냄새가 날 까 등 이런 생각들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내가 3학년이 되면서 시험 준비하느라 잊게 되었다. 그렇게 내 중학생 시절은 性성에 눈을 뜰 때였다.

[ 뻥이요]
겨울 철 아버지는 일이 없어 손을 노을 때가 많았었다. 하지만 엄만 일없이 놀고 있는 아버지를 싫어하셨다. 엄만 '노가다는 원래 그런거야 그러니깐 일이 있을 땐 부지런히 돈을 벌었어야지' 라고 아버지께 눈치를 주셨었다. 아버지도 엄마의 그런 눈치가 싫어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아버지는 자기일 삼아 일하셨다. 그런 생각으로 일을 벌인 것이 뻥튀기장사였다. 아버지는 기계를 사서 단 며칠만에 뻥튀기의 모든 것을 배웠다. 내가 보기엔 쉬워 보였는데 왜냐면 아령같이 생긴 기계를 계속 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그러나 계속 불을 지펴서 기계를 뜨겁게 해야하는데 지금은 가스보일러로 불을 지피지만 그땐 나무로 때워야 했다. 아버진 공사장에서 버려진 나무를 쓰셨는데 어디서 구해와서 크기를 맞추고 다시 긴 것은 짧게 분질러야 했다. 그 화火력으로 기계를 뎁혀야 했기 때문에 나무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런 것은 아버지가 맡으셨다. 건축일 하면서 주변관계가 좋았었고 융통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계를 멈추고 열 때 압력으로 '펑' 하는 사람의 고막을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것만은 아버지 몫이었다. 뻥튀기는 뻥하는 그 순간이 일품이었는데 자칫 시간을 순간적으로 열어야 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천천히 연다면 내용물 역시 제대로 튀겨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온도도 잘 맞혔고 뻥 튀길 때도 단번에 하신다. 우린 쌀을 튀겨주기만 했는데 그걸 딱딱한 오꼬시로 만드는 일은 뒷집 아저씨가 맡아 하셨다. 오꼬시는 공기의 압력으로 부푼 쌀 등을 물엿으로 입히고 그것을 긴 작대로 사각을 만들고 중국집에서나 볼 수 있는 칼로 일자로 자르면 되는 것이었다. 아저씨의 별명은 '꽈배기'아저씨였는데 옛 날 꽈배기를 만들고 팔기도 하셔서 그런 별명이 붙은 걸로 안다. 아저씨는 그런 면에서 상당한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장사를 시작하면 사람들이 입에 입을 거쳐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는데 그 손님들을 모두 맡아 오꼬시를 만들어 주면 금새 뜨겁거나 따뜻했던 낮 시간은 어느새 어두컴컴한 저녁으로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는데 추워지면 따뜻한 음식을 찾게 되는데 그렇게 바쁘게 보냈는데 중국집에 가서도 자장면이 제격이었다. 아버지의 파장을 지켜보고 있던 나나 친구는 으레 자장면을 먹였는데 자장면을 먹으려는 속셈으로 아버지가 일하던 곳으로 간 적이 있었다. 철없던 시절의 나였었다.

[고등학생]
내가 중학생 일 때 역시 키가 작았었다. 하지만 3학년 때 하루가 다르게 티가 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쑥쑥 자라더니 고등학생 일 때는 남들과 비슷했다. 무엇보다 입학식 때 웃긴 사건이 있었다. 커다란 벽판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신입생들은 9시 전원 운동장에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운동장을 내가 찾을 수 없었다. 보통 학교는 정문이 있고 본 관은 정문 맞은 편에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간 고등학교는 그렇지 못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앞엔 연못이 있었고 좌측엔 도서관이 우측엔 체육관이 운동장은 그 체육관 옆에 있었다. 그것도 큰 운동장이 존재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난 분명 공고인데도 남녀공학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학교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배나 더 컸다. 오죽했으면 학교를 다 보기 위해 며칠이 걸렸다는 것이다. 내가 중 3일 때 D공고 카타로그를본 적이 있었다. 그때 건축과의 설계를 하는 모습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그렇게 건축과를 지원했고 다니게 되었다.
중학생 일 때 갑자기 내 물 만난 콩나물처럼 키가 쑥쑥 자란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자랐다고 남들보다 키가 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자란 만큼 남들도 자랐기 때문이다. 난 언제나 키 작은 난장이 같은 생활을 했었으나, 단지 어렸을 때 꼬맹이 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을 뿐이다.
첫 수업이 끝나자 2학년 선배들이 교실로 들어왔다. 이유는 써클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써클이란 말도 내겐 생소했는데 '써클'이란 말은 텔레비전에서 뉴스시간에 불량 써클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선배라는 이유로 강제적으로 후배의 입에 담배를 물려준다든가 술을 먹인다든가 뉴스에선 써클은 신입생들에겐 굉장히 나쁜 인식을 심어주었었다. 그러나 내 귀가 얇아서 가입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옹졸한 내성적 성격을 바꿔볼 생각이 있었다. 써클에 대해선 다시 쓰겠다. 14쪽을 보라. 내가 써클로 들어감과 동시에 나의 내성적인 성격이 바뀌어 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친구가 많아졌다. 다른 과 친구들을 사귀어서 좋았고 그리고 우리 학교와 결연 맺은 여 학교가 있어서 더 좋았다. 과 에선 그러니깐 같은 반에선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인 복현동과는 너무 먼 동네의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같은 반에서 알고 있는 친구가 있음은 친한 친구가 있다는 말과 상통하는데 유별난 친구도 있었다. 그 앤 '검도부'였는데 아이가 좀 과격한 면이 있어 다른 친구들은 그 애와 말도 걸지 않았다. 그런 면에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반엔 나보다 더 작은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같은 키 작은 서러움을 나눴었다. 또 한 녀석은 여자처럼 주끈깨가 온 얼굴을 덮고 있는 친구 다소 다정다감함을 풍기는 친구와 다정하게 지냈는데 우리는 주말이면 자전거로 많이 즐겼는데 가까이 경대(친구는 경대를 보자 무슨 공원으로 알았다고 했다.) 멀리는 하양 더 멀리는 청도까지 하이킹을 한 적이 있다.
하양으로 떠난 이유는 대구 비행기장근처에 사는 친구가 한 말 '내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봤는데 고기잡는 모습을 봤는기라 제성아, 니 매운탕 만들 줄 아나 내가 가르쳐 주께 한 번 가보자 응?!' 이렇게 말하는데 내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렇게 우리 셋이서 자전거로 낚시를 떠났었다. 친구가 앞장을 서며 가고 있었고 버스가 우리를 스치며 지나갔으나 난 자전거가 없는 관계로 주인 없는 자전거를 주워서 타고 있었는데 앞바퀴가 똑바르지 못하고 삐뚤삐뚤 한 자전거였다. 그 자전거는 한 참을 달리다 말고 멈춰서서 앞바퀴를 사타리에 넣고는 자전거 핸들로 몇 번 자리를 잡아줘야 계속 탈 수 있었던 그런 자전거였다. 어떻게든 대구를 벗어나 차들이 앞을 다투는 도로로 쭈욱 계속 나아가자 나의 오른 편는 푸른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은 내가 어렸을 때 가끔 놀러 가보던 동촌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강가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조개를 줍는 사람, 파리낚시로 고기를 잡는 사람 등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나는 빨리 나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우리의 자전거가 멈춰선 곳은 작은 가게가 있는 곳이었다. 그 가게는 우리 같은 사람을 상대로 장사하는 집인 셈이었다. 우린 굴다리를 통해서 내려가야 했는데 그 다리는 철도의 아래였다. 그래서 기차가 지나갈 때면 볼만했다. 기차를 탄 사람들이 차창을 통해 손을 흔든 는 사람과 기차 밖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 바로 기차가 지나는 굴다리 밑에 우리가 있었다. 밑에선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거기에도 물고기가 있었다. 피라미들 ^_^ 실개천은 강으로 흐르고 있었고 우리도 실개천과 같이했다. 그런데 강은 생각보다 넓었으며 반대편으로 건너갈 방법은 없었다. 결국 바지를 허리까지 올리고는 누군가 만든 물에 잠긴 징검다리 위를 아슬하게 건너는 방법밖에는 그렇게 건너다가 누군가 쳐놓은 파리낚시를 봤다. 파리낚시는 낚시 줄에다 간격을 두고 짧게 낚싯줄을 군데군데 걸려있는 것이 파리낚시이다. 물고기는 물결 따라 움직이다보면 얼핏 파리가 보인다. 그럼 이게 왠 횡재냐고 본능적으로 느껴 그것을 역시 본능적으로 물어버린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잡힌 물고기를 파리낚시를 설치한 사람이 오기 전에 실례를 하는 것이다. 난 파리낚시를 첫눈에 알아본 것은 내가 대여섯 살 적에 더운 여름 날 엄마와 동촌으로 와 본적이 있었다. 그땐 동촌의 물은 얼마나 맑았는지 그냥 먹어도 아무렇지 않았었다. 그래서 내가 수영을 하겠다는 말로 물 속으로 뛰어 들어 잠수를 하는 척 물 속에서 때 입을 쫙 벌려 있으면 맑은 물이 내 입을 통해 내 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때 몇몇이 낚시를 했었는데 내가 낚싯대에 미끼를 달고 물고기를 유혹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냥 일렬로 기다랗게 꽂아 놓으면 물고기가 와서 무는 방식이었다. 그땐 동촌의 물도 참 맑았는데 상류가 유흥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발전하는 만큼 하류엔 탁해져만 갔다. 어떨 땐 기름 덩이가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온 적도 있었다. 여기 하양은 상류 중에도 상류에 속한 곳이었고 파리낚시를 하는 사람이 물에 잠수하고 있는 징검다리 부분에서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실례한 물고기로 친구가 매운탕을 만들었다. 매운탕이라고 특별난 것은 없고 코펠이나 냄비에 흐르는 물을 살짝 컨닝을 하고 그 물에다 훔쳐온 물고기를 푹 삶으면 그것으로 절반은 한 것이다. 푹 삶았으면 숟가락으로 불어터진 물고기를 짓누른다. 물고기의 사체가 들어있는 냄비에다 된장 고추장 생강 파 양파 등등 온갖 매운 양념을 다시 넣어 끓인다. 뼈? 짓누를 때 byebye 했을 것이고 펄펄 끓였기 때문에 먹는 것에도 안전하다. 아 춤 넘어 간다

[ 써클 ]
학교 첫 수업이 끝나고 몇몇의 학생들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도 화장실로 갔었는데 기겁을 하고 나와야 했다.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난 아마 너구리였나 보였다. 다시 교실로 돌아 왔을 때 2학년 선배가 들어와 있었다. 자기네 써클을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보이스카웃, MRI, RCY 등 그 외 여러 가지의 써클이 있었지만 난 RCY에 가입을 했다. 당시 TV에선 불량 써클(12쪽 이하 참조)이 문제가 되었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써클 가입을 꺼려했다. 나 역시 가입할 생각은 없었지만 2학년 선배가 하는 말에 '대체 다른 과에서는 많이는 없어도 몇 명은 있던데 건축과는 너무나 소심하군' 그 말을 들은 나는 기분이 나쁘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조건 가입을 했다. 나의 가입의 또 다른 목적은 나의 소심한 성격을 바꿔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런 의도는 적중했다. 여자친구들도 생긴 것이다. 당시 우리학교와 결연을 맺은 학교는 K여상이었다. 써클에서만. 그런데 잘 지내왔던 관계가 2 학년 자기네들끼리 트러블이 생겼나 보였다. 결국 결연 관계는 끊어졌다. 그러나 1 학년 우리에겐 말하지 않았었다. 그런 것도 모른 체 난 바자회 연습을 열심히 했고 내가 맡은 패션쇼 연습을 위해 부지런히 걸었었다. 2학년 선배들은 여자 애들과 함께 할 패션쇼는 남녀가 어우러져야 멋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자매학교가 없다는 이유와 바자회는 계속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매와 끊어졌다는 것은 비밀리에 우리 일 학년들은 계속 연습을 했었다. 2학년 선배가 자매 학교와 관계가 끊어졌음을 말했다. 그러나 준비한 바자회는 계속 되어야 했다. 결국 몸이 약소한 나와 친구 몇이 여자로 분장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없어진 장소가 예전엔 미문화원이 있었고 문교부 창고이기도 했었다. 그 장소에서 내가 여자 옷을 입어야 했는데 여자 옷을 준비하기로 한 친구가 준비를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협회 여자임원의 옷을 빌려 입어야 했는데 책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큰 칸막이를 사이로 그녀가 벗고 반대편으로 던져주면 내가 입었다. 내 옷은 그녀가 입고 화장까지 하고 때는 여름방학 시작할 즈음이라 땀은 비 오듯 흘러내렸다. 무대로 나갈 시간은 다가오고 선배가 재촉을 하자 무대로 나갔는데 창문을 커튼으로 가렸기 때문에 실내는 어두웠고 순간, 순간 깜빡이는 싸이키 조명은 쉴새없이 깜빡이고 있고 나는 무대로 나갔다. 갑자기 무대아래에서 남자들의 아우성 소리가 그득했다. 모두 친구들이었다. 캄캄한 공간에 사뭇어뭇 조명이 빛을 발하고 있는 가운데 내가 앞으로 걸어나가자 아니 이럴수가 담임선생님이 무대의 바로 앞에 앉아 계시는 거였다. 다행히 싸이키 조명 때문에 날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난 무엇에 당황한 듯 가슴 뜨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늦게 내가 마지막 공연을 할 때 꽃다발을 받았다. 날 여자로 생각한 녀석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못된 친구들 같으니

[ 신문배달 ]
난 중학생 일 때도 고등학생 일 때도 신문을 배달했었다. 내가 중학생 일 때 신문배달을 시작했는데 새벽에 일어나기가 힘이 들뿐이지 재미도 있었고 월급을 받는 기쁨도 있었다. 비록 쥐꼬리만한 돈일지언정.
고등학생 일 때도 재미 삼아 신문을 돌렸는데 배달한다는 말을 우린 돌린다고 표현했다. 그땐 친구 셋이서 신문을 돌렸는데 지소는 같은 곳이었다. 친한 친구와 더운 여름 날 경북대를 지나서 지소로 갔었는데 우린 노래를 주고받으며 지소로 향했다. 그때 우리가 부른 노래는 가수 최성수의 풀잎사랑을 많이 불렀는데 난 지소에 가서 신문을 챙겼는데 신문은 본부에서 신문을 받으면 그 신문들 속에 지소에서 받은 광고지를 삽입을 한다. 그리고 각자가 맡은 신문 부수를 배달원에게 주면 배달원은 신문을 집으로 배달을 하는 것이다. 난 배달을 하면서 까지 노래를 불렀었다.
한 번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난 벌써 배달이 끝나가고 있었는데 비가 내리자 그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부르며 지소로 향했었다. 누가 불렀는지 모르나 노래는 대충 이랬다. '비야 내려라 바람아 불어서 이내 발길 맞으라 ' 그런 내 모습이 멋이 있었는지 여자가 지나가며 피식 웃더라 날 불쌍해서 그랬나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 집은 내리막길에 있었고 집은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었다. 마침 갈증을 느껴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나시고 있을 때 주인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내 옆에 신문뭉치를 보고는 날 신문배달 하는 사람으로 알았을 것이고 아주머니는 별 신경을 안 쓰고 자기 일을 계속 했다. 그런데 내가 물을 다 마시고 몸을 일으켰을 때 난 보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아기 엄마였나 보다 자신의 가슴을 꺼내고 조그만 깡통에 젖을 지어 짜고 있었던 것이다. 난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아주머니는 날 보면서도 도톰한 가슴을 꺼내어 젖을 짜내고 있다니 아주머니보다 내가 당황해 정신을 차린 뒤 나왔다. 누가 정신 없는 사람인가 둘 다 똑 같지 뭐

[ 자원봉사(물 봉사) ]
대구에서 해마다 5월이면 대구 시민의 단합을 위한 행사가 있다. 그 중에서 '백만인 걷기 대회' 가 있다. 그보다 앞서 독자 분들은 대구의 지리적 상황을 아셔야하겠다. 대구는 대한민국 우리나라 땅에서 가장 덥기로 소문난 도시이다. 이유는 대구를 산맥이 포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비가 내릴 예정이라고 하더라도 대구는 비가 잘 내리지 않는다. 더구나 대구가 공업도시로 발전해 가면서 더욱 그러하였다. 항아리가 대구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그런 조건들 때문에 백만인 걷기 대회에서 도중 물을 공급해야 한다. 물론 참으며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겠으나 만약 도주에 마실 물이 없다면 참가를 하지 않을 것이다. 무더운 날씨에 왜 수십 킬로미터를 걷겠는가! ! ! 무슨 모금을 위해서였나 보다.
걷기 코스의 중간쯤에 사람들은 앞산 공원을 지나간다. 충혼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거기서 조금 걷다가 보면 적십자 건물이 작게 있었는데 난 적십자 건물의 앞에서 물을 공급했었다. 하나 둘 그렇게 사람들이 지나갔었는데 날씨가 더워질수록 사람은 마치 피난민처럼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더구나 평소 갈증이 심했던지 스텐레스 물통을 보자 환장을 하는 것 같았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것은 무작정 물을 마시기 위해 달려든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줄을 서서 물을 주어야 했는데 그런 역할을 내가 해야했다. 그러나 수통 두 개로도 물을 공급하기란 모자라기 일쑤였고 사람은 계속 몰려오지, 물은 없지 그렇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성질 급한 대구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가 두려워 난 적십자 건물의 화장실에서 물을 받았다. 그걸 급하게 수통에 채우고 질서를 세워야 했으니 그 날은 내 정신이 아니었다. 나의 입은 '따발총'이었다. 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기관총의 총알보다 더 빨랐었다. 빠르고 정확하게.
때론 외국인도 보였는데 그들은 질서를 지켰었다. 사람의 행렬이 뜸해지자 우리도 백만인 걷기의 최종지인 두류공원에도 갔다. 그곳에서 빠른 나의 말씨에 모두가 대단하다고 말하더라 어쩌랴! 타고난 습성인데 뭘^_^

[ 별난 세계 ]
고모도 우리 가족의 뒤를 따라 대구에 왔었다. 고모는 내가 보기엔 미인이었다. 같은 문가家니깐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 ! ! 하지만 고모와 우리와는 물리적인 면으로 볼 때 너무도 먼 거리에 있었었다. 우린 복현동에서 오래 살았지만 이사를 한다고 해도 같은 동同 이었다. 그러나 고모 네는 달랐다. 항상 더 나은 장소로 아니면 직업을 따라 동네가 바뀌곤 했었다. 그리고 고모 집은 버스를 타고 반시간을 가야했는데 버스를 타야 한다는 말에 엄마는 고모 집에 가기를 별로였다. 그래서 고모 집에 가는 사람은 언제나 나와 여동생뿐이었다. 여 동생과 나는 통하는 것이 있었는데 멀미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심하게 흔들리는 놀이기구를 타더라도 우리에겐 재미가 배가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버스를 탄다는 것은 또 다른 우리에게 숨겨진 호기심을 발동할 뿐이었다. 고모 집은 봉덕동이었는데 우리 집처럼 봉덕동을 떠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봉덕동은 미군부대가 상주하고 있었는데 복현동에서 외국 사람을 본 다는 것은 일기장에 기록될 중요한 소재가 되었지만 그건 순전히 복현동의 일이지 봉덕동에서 그런 문제로 일기장에 기록한다면 한 집에 일기장이 몇 권이 되어야 옳았다. 그만큼 외국 사람을 자주 볼 수 있던 곳이었다. 고모 집은 단독주택이었는데 바로 옆에 이웃한 집이 미군 장교가 살고 있었다. 내가 중학생 일 때 고모 집에도 우리 또래의 동생과 누나가 있었다. 같은 또래라는 이유로 말이 없어도 잘 통했는데 고모 집의 발코니(장독대)에선 바로 이웃집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바로 장독대가 있던 곳이었다. 어느 날 사촌 동생이 장독대에 올라가 이웃집을 염탐하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동생이 내게 큰 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히야, 옆집엔 커다란 개가 있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개가 있는 것이 무슨 대수랴 그런데 동생의 다음 말이 나의 시선을 끄는데 한 몫 했다. '히야 옆집 개는 커다란데 그 개가 돈을 물어다 담 밑에 숨겼어 주인이 찾을 텐데' 라고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럼 주인이 보이면 돈이 여기 있다고 말해라 라고 내가 말했다. 동생은 영어 회화 책을 가지고 나타났다. 누나의 것이었다. 대원아 그거 누나거 아이가, 라고 말하면 갸 꺼는 말 안 해도 된다 지가 어쩔 긴데 동생은 누나를 '갸'라고 불렀다. 엄연히 손위인데도 그 앤 위아래가 없는 아이였다. 그러나 그 책을 본들 지가 영어를 알 것인가 다시 책을 제 자리에 갔다놔야 했다. '히야 저기 저 집에 사람이 온다 난 쪽팔려서 말 못하겠다.' '그럼 가마이 놔둬라 찼든 못찼든 신경 쓰지마라.' 동생이 장독대에서 내려왔다. 뭔가를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함께.
다음 날 난 대구의 찌는 듯한 더위를 원망하며 집을 나와 골목에서 사촌 동생과 어울렸다. 무슨 게임을 하며 놀았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러다 우리의 앞을 지나가는 여자가 있었는데 노란 머리로 미국 소녀임을 알 수 있었다. 예쁘지는 않았지만 밖으로 노출된 기다란 팔과 치마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하얀 다리만으로도 피 끓는 사나이의 심장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하겠건만 여자아이의 뒷모습은 내겐 충격적이었다. 그 이유는 아 글쎄 그 아이가 입은 옷은 앞만 있지 뒤가 없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더우면 그렇게 다녀도 별 문제없겠지만 여긴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에선 좀 그랬다. 아무리 덥기로서니

[ 디스코 텍 ]
고등학생 일 때 반에 놀다한다는 친하던 친구의 꾐에 시내의 한 디스코 텍으로 갔을 때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일 때의 일일 것이다. '친구따라 강남가는 식'으로 말이다. 친구는 자기가 좀 안다고 있는 폼 없는 폼을 내가며 내가 포함된 친구들을 디스코 텍으로 안내했다. 난 당시 너무 순진한 편에 속해있었는데 '디스코 텍' 하면 이미지가 좋게 생각되지 않아서 좀 꺼려했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왜 그런 곳은 골목에 있느냔 말이다. 넓고 탁 트인 곳에 있었다면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지 않았을 텐데.
내가 처음 간 곳도 그랬었다. 넓고 밟은 곳이 아니라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있었다. 입구에선 조폭처럼 생긴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서자 큰 소리로 '어셔옵쇼' 라고 말하며 구십도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난 주춤했었는데 왠지 그런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친구가 앞장을 서며 안으로 들어가고 난 친구 따라 뒤따라 들어갔다. 실내는 겉으로 상상했던 것과는 차이가 너무도 났다. 아직 해가 서산으로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는지 손님은 별로 없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아침 러시아워를 연상하게 할 정도였다. 말 그대로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었으니 하긴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도 춤을 추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리고 들어오는 손님에겐 콜라를 병 채로 주었는데 내가 테이블을 지나며 콜라를 먹어도 화를 낸 사람은 없었다.
난 써클에서 배운 것으로 춤을 추었었는데 바자회를 준비하면서 난 패션을 준비했는데 패션쇼는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고 넓은 청소년 적십자회관에선 하루 종일 걷기만 했었는데 다른 팀 '허슬'이나 '브레이크' 팀도 같이 연습하곤 했었다. 난 그걸 눈으로 배웠다. 난 진작부터 춤에는 소질이 있었나 보였다. 눈으로 배웠어도 누구보다 잘 했었다. 그렇게 배운 것으로 디스코텍에서 써먹은 셈이었다. 그리고 내가 춤을 추면 주위에 공간이 생기곤 했었는데 나의 춤이 과격해서가 아니라 모두들 내 춤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난 브레이크를 해서 여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브레이크나 허슬을 할 줄 알면 새로운 춤도 금방 배웠는데 닭 춤이 그 대표격이었다. 다음 대구에서 최고의 디스코 텍에서 춤을 출 때 누나와 동생도 함께 했었다. 그런데 내 동생이 하는 말에 따르면 내 춤은 너무 야하다고 했다. 난 춤에 메세지를 담았는데 넌 너무 이쁘다 넌 색시해 등등
그때가 그립다

[ 써클 여름 수련회 ]
학교(써클)에서 해마다 여름이면 수련회를 간다.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좋은 것은 3박 4일 동안 여학생들과 함께 보낸다는 것이었다. 남자들이 여 학생과 같이 있으면 누구나 좋아한다. 왜? 남자는 모두 늑대니까! 난 1학년이고 2학년 선배가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선배들에겐 재미가 덜 할지 모르지만 1학년인 나와 친구들은 기분이 좋았다. 더구나 여 학생도 같이 간다니 기분이 배일 수밖에
우린 남부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고 수련회 당일 날 대구남부 터미널에선 대구공고 학생들과 K여상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2학년 선배들의 인솔로 우리들은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자리에 앉다보니 내 옆자리에 K여상 누나가 앉게되었다. 누나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다만 생각나는 것은 누나가 졸음이 온다며 나에게 말했고 난 자라고 말했다. 도착하면 깨우겠다며. 한 한 시간을 달렸던 것 같다. 나도 졸음이 오기 시작했지만 누나의 머리 향기를 맡으며 꿎꿎이 누나를 지킨다는 생각으로 그러나 출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누나가 내게 기대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그러다 누나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 같아 나의 오른 손과 왼 손을 동원해 누나를 잡아야 했다. 나의 오른 손은 누나의 어깨를 덮고 있었으며 나의 왼 손은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버스의 요동에 내 손이 누나의 젖무덤에 간 것이다. 난 얼굴이 달아올랐으며 차창을 통해 본 나의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였다. 누나의 가슴에 있는 손 누가 볼까 두려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속으론 버스야 마구 흔들려라 생각하며 버스가 청도면에 도착하자 구십도 버스가 회전을 했다. 다행히 누나는 잠을 깨지 않았지만 나의 가슴은 마치 몰래한 사랑을 들킨 것처럼 두방망이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누나의 샴푸냄새가 좋았지만 그 뿐이었다. 버스가 멈췄다. 운문사에 도착한 것이다. 누나를 깨워야 했다. 그때 우연을 핑계로 누나의 가슴을 왈칵 잡았다. 힘을 주어 그렇게 누나를 깨우고선 누나는 누나대로 나는 우리들과 어울렸다.
운문사는 터가 굉장히 넓었는데 선배들이 돈을 내고서 들어 가야했는데 입구에서 멀리 가지 않고 자리를 잡았다. 우리의 텐트자리는 옆에 내 천을 두고 있는 자리였다. 곧 우리 1 학년들은 텐트를 치고 밥을 짓기 시작했다. 설거지는 여학생이 하기로 하고. 카레를 섞은 밥은 남자들이 한 밥치곤 맛이 있었고 잘 했었다.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우리 1 학년들은 서로가 통했는지 옆의 개울 천으로 뛰어들었다. 무더운 날씨 탓에 옷을 벗지도 않고서 물로 달려들었기 때문에 옷을 흠뻑 젖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옷이 젖음은 다들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물에서 나오면 곧 마르기 때문이었다. 튀어보려는 영웅심(그렇게 해야 여학생들이 날 생각해 줄 테니까)에 옷을 빨겠다며 젖은 옷에다 비누를 칠했다. 그러곤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곤 여러 번 했다. 맑은 개천에 내가 흐트려 놓은 것이 미안했지만 수량이 풍부해 곧 맑은 물로 되돌아가곤 했었다. 다음 날 우린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요 앞에 약수터가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하늘을 가리운 높은 나무들 사이로 여자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아줌마들의 목소리였다. 계속 걸어 들어가니 왠 누드의 여자들이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약수 물로 목욕을 하면 피부가 젊어진다나 아줌마들은 우리를 보았으나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도리어 큰 소리를 친다. 썩 꺼지라고. 우린 다시 내려와야 했다. 내려온 건지 쫒겨 간 건지 모르겠다.
수련회에서 돌아오고 추억이 찍힌 사진을 보았다. 내가 옷을 입고서 목욕(?)을 한 장면을 보았다. 앗 이럴수가 사진에는 내가 아닌 아버지의 모습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닮았기로서니 내 안에 아버지가 있었다니 그래서 부전자전이란 말이 있는 걸까

[입대]
세월이 흘러 내가 고등학생 일 때 난 군대를 가기 위해 흔히들 말하는 신검을 받았다. 남들보다 일찍 출생신고가 된 나는 그렇게 대전으로 갔다. 아마 출생한 곳에서 신검을 받기로 되었는 것 같다. 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신검을 받았었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나로서는 이방 도시는 늘 내게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나 보다.
그때 내가 전화로 여자에게 했었는데 그녀는 같은 회사 직원이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피라미드 회사였는데 회사에선 상대에게 악수로 인사를 했으며 같이 있을 땐 서로의 팔을 엇 돌려 끼었었는데 모두는 팔짱을 끼고서 설명을 들어야 했었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팔짱을 끼는 것은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었다. 우린 매일을 만나 경대를 팔짱을 한 체 배회하곤 했었는데 내가 입대 전 날 그녀에게 전화를 했었다. 내일부턴 만날 수 없을 거라는 말을 전하러 내가 입대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우리 그동안에 있었던 거 잊기로 해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기가 막혀서 기분이 팍 상했다.
그런 내가 군대를 가게 되었다. 나나 어머니는 물이 걱정을 하셨다. 군대에서는 맘대로 물을 마실 수 없는 곳이 아닌가 더구나 나의 엄청난 오줌은 어떻게 해결을 한단 말인가
이런 걱정을 남 모르게 숨기고 논산으로 향했다. 남들처럼 거대한 송별식은 생각지도 않았고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난 아침에 어머니께 가벼운 인사로 "갔다 올게요." 라고 친구 집에 가는 것처럼 말을 하고 터미널로 향했다.
논산 고향 근처라는 생각이어서 그런지 마음에 부담이 없었다. 머리도 긴 장발(정도는 아니지만 짧은 군인에게 비하면 장발이지)이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아도 입영자 라고 생각 못했을 것이다. 대전을 거쳐 논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경상도 군번과 충청도 군번이 함께 입소하게 됨을 알았다.
입영소 부근 이발소에서 머리를 바짝 깎았다. 그리곤 이발사 아저씨가 들어가기 전에 좋은 추억 삼아 여행을 아니 정확히 관광을 하란다. 그래서 나와 같이 머리 깎은 남자와 통성명을 나누고 택시를 탔다. 이발소 아저씨와 택시 운전사와 모종의 얘기가 오고갔음을 나와는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대충(대충 이라 함은 지금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고 중요한 것은 군복무였다.) 관광을 하고 입영소로 왔을 땐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이 모였었다. 난 그들과 섞여서 행동을 같이 했다. 헌병 두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그 헌병들은 완전히 장식품에 불과했다. 여기가 군軍대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리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군에 먼저간 아들을 면회를 하고 있었다. 난 그런 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왜냐하면 일행(무리)들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행(일행이 아니라 무리라고 보는 것이 더 좋겠다.)들은 군 내무막사를 구경하고 소위 PX에서 물품을 구입을 했으며 역시 군대 제품이라 가격이 저렴했다. 난 아무 것도 사지 않았었다. 필요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냐 군대니까
잠시 후 스피커에서 들리는 목소리. 아마 장교였으리라 그는 요즘 군대는 예전의 군대처럼 폭력과 군기가 센데가 아님을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 우스개 소리로 사람들을 안심시켰었다. 너무나 우스운 말로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편하게 했다. 그러나 잠시 후엔 전혀 예상 밖의 일에 나나 다른 사람들이 겪어야 했다.
"오늘 입대할 사람들은 모두 연병장으로 모여주십시오. 모두 앞으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아! 부모와 누나 동생들아 난 간다

나와 앞으로 나의 친구들이 될 친구들은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족히 천명 정도는 가뿐히 될 것 같았다 아니 그 이상이 될지도 우리들을 인솔하는 사람은 푸른 제복을 입은 군인이었다. 장교? 장교가 바쁜데 뭐하러 오겠나 우릴 맞은 군인은 사병이었다. 작대기 두 개나 세 개 우리들이 모이자 시끄러웠다. 하긴 경상도 출신과 충청도 출신이 모였으니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니도 왔나' '난 큰일이구먼'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들리는가 하면 무식하게 들리는 경상도 말씨
우릴 곱게 운동장(연변장)에서 귀퉁이 작은 건물로 이끌더니 상병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이 새끼들아, 잡담 금지.' 라고 말했지만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한 친구들이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잡는데는 폭력이 그 힘을 발휘했다. 상병이 어수선한 상태에 있는 아이를 시범적으로 구타를 했다. 사람을 완전히 죽이는 구타였다.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은 말하지 않아도 질서정연하게 줄을 섰다. 맞은 놈만 불쌍하다 재수 없게 걸렸기 때문이다.
우린 임시 내무반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으란다. 소지품도 모두 내 놓으란다. 군대에선 돈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입었던 옷과 소지품을 흙탕물 같이 누런 이로 봉투에 넣고서 집 주소를 적었다. 그리고 새 군복을 받았다. 팬티도 있었다. 하긴 팬티도 모두 보내버렸으니···
때는 여름이라 비가 자주 내렸다. 밖에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다. 군대에서 자기가 군인임을 실감할 땐 꿈에서 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본 다면 군인이라고 말하지만 난 그때나 지금이나 군복 입은 내 모습은 보지 못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는 것이 잠시 후 얘기하겠지만 난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지 재수가 없었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우리 연대는 논산 훈련소에서 제일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십 오 연대 일 부대 우리 부대는 옆으로 고속도로가 나 있었다. 나는 일 중대에 속해 있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데모(농성)가 유행했었다. 그래서 인지 군인 중에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을 건 어쩌면 당연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런 아이의 사상을 바꿔야 했다. 날마다 비디오 방송을 통해 그런 교육을 우리들에게 주입시키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런 시간이 낮잠을 잘 수 있는 계기가 되었었다. 입대하기 전 라디오를 통해서 한불수교 백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난 그때 프랑스 대혁명을 조금 알게 되었다. 그때 귀로 들은 것을 써먹을 수 있는 계기가 군에서였다. 그런 비디오로 방송을 하고 난 뒤들은 내용을 평가하는 시간이 있었다. 난 입대하기 전에 소위 피라미드 회사에 잠 간 있음을 앞에서 밝혔다. 거기서 배운 것이라곤 발표력 뿐이었다. 난 그땐 말을 유창하게 잘했었다. 내무반은 마루(나무가 아니고 콘크리트로 된 것임)같은 것이 두 줄로 있었고 그것이 침상이었다. 그리고 침상과 침상 사이에 총이 있었다. M16이 소대원의 개수만큼 있었고(우산대 모양으로 총대가 기다랗게 침상의 사이에 있었다) 거기서 서 있는 채로 내가 발표를 했었다. 나의 이상한 억양 때문에 친구들은 배를 잡고 웃기에 바빴었다. 그 와중에 중대장님이 나의 발표를 듣고 흡족해 했다. 소대장을 따로 불러 얘기를 나누곤 소대장이 나에게 말했다.
'백 이십 사 번(훈련병은 나름의 번호를 부여받았는데 나는 백 이십 사 번이었다.), 너 사회에 있을 때 사기꾼이었지 하하 농담이다 네가 하도 잘해서···'
그때부터 난 소대장과 중대장에 잘 보인 것 같았다.
우리들은 태권도를 배우는 시간이 있었는데 내가 어렸을 적에(그땐 무척 작았었다.) 태권도를 배웠는데 검은 띠를 따고 그만두게 되었었다. 이유는 도장의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그때배운 태권도를 군에서 써먹게 될 줄은 몰랐었다. 내가 백 이십 사 번이었고 내 옆이 백 이십 오번 이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좀 안 되는 부류였다. 군에선 그런 사람을 '고문관' 이라고 한다. 내 옆 친구가 고문관이니 사회에서 태권도를 배운 사람을 조교로 만들어 고문관 들을 따로 가르쳤다. 그럭저럭 적응을 하는 편이었다.
난 여름에 한참 더울 때 입대를 했다. 여름이라 비 님도 엄청 오셨다. 하지만 비가 온다고 전쟁이 없을 소냐 한번은 우중에 사격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날에 불찰이 내게 생긴 것이다. 난 물 없인 못산다. 그리고 참기 시작하면 누구보다도 오래 참는다. 아침부터 난 물을 미리 많이 먹어뒀었다. 이유는 뻔하지 않는가 그렇게라도 먹어야 왠지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중대를 받고 연대에 있을 때 소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의 계급은 하사였을 것이다. 늘 내무반을 지키는 사람이 그였고 우리의 훈련을 책임지는 사람도 그였다. 그가 우리에게 말했다. '이번 식사당번을 정해야 겠다. 하고 싶은 사람은 자원해라.' 그래서 내가 자원했다. 조금은 염려는 있었지만 지원을 잘했다. 내가 맡은 것은 우리들이 식사를 다하고 난 뒤에 청소를 해야하는데 그걸 맡았다. 식사를 할 때 늘 그들보다 앞서 식당으로 가야한다. 식당은 연대의 보이는 맞은 편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들이 식당으로 갈 때는 일렬로 줄을 맞추어 가야했으나 식사당번들은 늘 먼저 가야했기 때문에 뛰어 다녀야 했다. 그렇기에 나는 줄 같은 건 지킬 필요도 없었다. 식사 당번을 맡으면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았다. 한 번은 우리 소대가 무슨 훈련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없지만 아마 피알아이'PRI'인 것 같다. 뜨거운 햇살을 친구(?)삼아 훈련과 얼차례를 당하고 있을 때나를 포함한 식사당번들은 물과 음식을 운반했었다. 내가 훈련하는 곳에 도착했을 때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은 사뭇 부러운 눈치였다. 논산 훈련소는 대기 온도가 삼십 도가 되면 훈련을 안하고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일 즉 군가를 가르친다거나 총을 수입(손질을 본다는 군대용어)을 한다는 등을 한다. 삼십도가 더운가 충청도 군번들은 더울지 몰라도 경상도 군번 특히 대구출신들은 삼십도에 혀를 내미는 꼴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대구의 여름은 삼십도를 넘는 알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일(군에선 주일이라 하지 않는다. 다만 일요일 일뿐) 에는 우리들도 종교행사를 할 수가 있다. 그땐 유별나게 교회가 그립더라 잘 다니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나 스스로도 '크리스챤' 이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로 갈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중대장이 우리를 인솔하며 데려간 곳은 절이었다. 중대장이 가면서 하는 말에 토를 달수가 없었다.
'제군들, 너희들 중에는 크리스쳔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주부턴 교회로 가고 오늘은 절로 가자 싫은 사람은 가서 실컷 자기나 해라. 그중에 정 난 교회 가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나에게 말해라.'
이렇게 말하는 중대장의 얼굴 표정은 모두를 절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전 절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나온 친구가 있었다. 믿음이 좋은 친구였을지 모르나 그는 중대장에게 죽도록 맞았다. 난 가서 입대해서 처음으로 낮잠을 잤었다. 절이라고 산사에 있던 것과는 달리 우선 생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긴 산이었다면 산에서 흘러오는 물을 받아먹게 '터'가 만들어져 있지만 여긴 평지였고 군부대 안에 건물을 빌려 절이라고 있으니 여엉 찝집한 기분은 시원한 물을 맘대로 마시지 못했음이었다.

[ 우정의 무대 ]
우리 연대에 아가씨가 나타났다. 사복도 반가웠지만 여자 그것도 아가씨가 나타났음은 우리 연대만이 아니라 훈련소 전체에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징조였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다. 저 정도의 얼굴로는 사회에서는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남자들의 세계인 군대에서는 치마만 두르면 늑대들이 침을 삼킬 정도였으니 ···그녀가 나타나자 연대에는 이상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옆 중대에서 가요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군대에는 군가만 존재해야 했었지만 가요가 불리고 있다는 것은 내무반장의 눈치가 보였었다. 왜냐하면 그 노래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유행가였고 내가 입대하기 직전까지도 '가요톱10'에서 1위를 노리는 노래였기 때문에 누구나 가사를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가수 이선희의 [아름다운 강산]
예전 감명 있게 부르던 노래였었다. 그 노래를 여기에서 부른다니 이게 나라가 망할 징조인가? 천만에 논산훈련소에서 '우정의 무대'를 한다고 소대장이 말했다. 모두는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사회에 있을 때 춤을 잘 추던 사람을 뽑았다. 난 자원했다. 그리곤 브레이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줘 춤에 재능이 있음을 알렸다. 그렇게 해서 뽑힌 훈련병만이 훈련에서 제외되었으며 그들만 춤을 연습케 했다. 우리들은 대략 열 명 정도였는데 내무반 하나를 빌려 연습을 했다.
우정의 무대는 많은 연대 중에서 하지 않았고 훈련소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대를 설치했다. 나? 차라리 확실하게 열외가 되었으면 좋겠으나 난 어정쩡한 위치에서 연습은 연습대로 훈련은 훈련대로 다 했으며 뭐 특별하게 튀지도 못했다. 생각 같아선 내 임의대로 만들겠다만 경험이 없으니 자신 있게 쓰지도 못하겠다. 우정의 무대가 있던 날은 전 훈련병이 한곳에 모였는데 실로 엄청난 숫자였다. 뽀빠이 이상룡 씨는 재미가 특출난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가 나쁜 것에 유혹이 되었다 할찌라도 그가 늘 책과 가까이 함을 난 존경한다. 으레 가수들이 나오고 군인들의 독특한 볼거리가 있었다. 그 중 어머니와 만나게 해주는 부분에선 나와 우리는 눈물을 찍어냈다. 군대 간 장병들은 다 효자가 된다. 늘 함께 했던 부모와 갑자기 떨어져 있으니 부모에게 잘 하지 못했던 것이 생각나고 평소 이불을 엄마가 깔아주고 덮어주고 했던 것이 생각나 집에 가면 내가 하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런 일상적인 프로가 끝이 나자 무대는 카바레와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어졌다. 우선 사회자가 노골적인 말투와 액션이 그랬고 그에 맞추어 프로들이 모두 엉큼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카바레나 회관에서의 일이란 말인가. 불 쇼, 각설이 쇼, 스트립(?)쇼 같은 것들 오 주여

[사격장]
여름철이라 땀이 비 오듯했다. 그러다 누군가 '소대장님, 우리 땀 좀 말리고 합시다.' 모두 그러자고 했는데 좀 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자 소대장님은 그 때 양 볕에 누워있어야 했다. 땀을 말리라고 해서 말리라고 그랬다고 한다. 첨부터 우리 그늘에서 쉽시다 라고 말했다면 상황이 바뀌었을지 모른다. 사격장으로 가는 날 장마철이어서 그런지 비는 자주 내렸었다. 비를 맞으며 사격장으로 향했다. 이 사격장은 일반적 사격을 하기 전에 총에 대해서(타켓을 맞추기 위한 가름자를 맞추기 위한 사격장이었다.) 비 떨어지는 소리가 사뭇 크게 들렸었다. 비록 여름이었지만 따뜻한 아랫목이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나 지금은 오줌이 먼저이다. 사격장에 도착을 했다. 약 삼 십분 거리에 사격장이 위치해 있었다. 곧은 자세로 행군하기가 몹시 어려웠었다. 그래도 억지로 참으며 사격장에 도착했다. 우린 훈련병이라 사격하는 모습만 눈으로 봐야했다. 사격장 울타리(아마 벽돌인가 블록인가) 벽에 선 자세로 난 남대문(군복에는 지퍼는 없다 모두 단추이다) 단추를 열고 그것을 꺼내고 시원하게 해결을 했다. 벽에다 했느냐 아니다 판쵸우의에다 했다. 판쵸우의는 군인용 비옷인데 전쟁시는 그걸로 천막을 짓는다고 했다. 그만큼 넓고 백 퍼센트 비닐이었다. 두꺼운.

난 사격엔 남다른 뭔가가 있나보다. 사회에 있을 때 유원지에 가서 사격을 할라치면 언제나 빗나가기 일쑤였다. 분명 초점을 맞추었는데도 총알은 타켓을 빗나가기가 대부분이었다. 그 문제의 해답을 알게 된 것이다. 머리 속으로 실버스타 스텔론을 그려보며 총을 들어보니 왠지 이런 폼으로 총이 가볍다 그리고 이런 개폼을 잡은 것을 소대장이 본다면 얼차례를 면할 수 없다. 다시 돌아가서 총을 쏠 때면 숨을 쉬지 말아야 한다. 맞아 예전 유원지에서 총을 쏠 때면 얼마나 가슴이 뛰던가 하지만 숨을 멈추고 총을 쏘았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은 철모를 뜨겁게 달구었다. 너무 더워서 총이 열 받았나 아님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인가 곧은 자세에서 로봇처럼 성큼성큼 한발을 내 딛을 때마다 백발백중 백발백중을 외치며 갔더니 B5 정도의 용지에 까만 원이 동심원을 그리며 가운데 10 밖으로 나오면서 9 8 7 6 5 4 3 2 1 0 순의 표적에 분명 세발을 쌌는데 표적엔 총알 자국이 아예 없었다. 정확히 원이 아니라 하얀 바탕에 세 발이 맞았다. 그걸 사병에게 내밀자 '이거 왜이래? 백 이십 사 번 제대로 보고 쏜 거냐?' 다른 사람 같았으면 꿀밤이라도 맞았을 텐데 총 세 발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중심해서 내 총의 가름좌를 고쳐주었다. 두 번째 사격 땐 조금 나았다. 그렇게 세 번을 거쳐서 내 총의 모든 걸 완벽하게 고쳤었다. 그 후 진짜 사격장(전 에는 간이 사격장이었다.)에서 사격을 하게 되었다. 사격장 군기가 가장 강력하다. 자칫 사람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격장에선 고문관으로 불린 친구도 정신을 바짝 차렸었다. 그렇게 해서 열 발을 쏜다. 탄피까지도 수거하기 쉽게 탄피 수거 통을 총 옆에다 붙이고 '엎드려 쏴' 자세로 쏘게 되어 있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우스운 일이 발생했다. 스피커에서 들리는 말 '십사로, 정신 있나? 왜 구 사로의 과녁을 맞추나?' 모두 웃었다. 혹시 그놈이 고문관? 열 발을 다 쏘자 모두 맞춘 훈련병을 열 외 시켰다. 물론 거기에 내가 속해 있었다. 열외가 된 사람은 겨우 세 명. 우리들은 그늘에서 마음껏 쉴 수가 있었다. 그때의 통쾌한 기분이라니 우리 세 명은 잡담을 나누었다. 우리들은 자칭 명사수라고 하면서 뻐기고 있었다. 더운 시간은 흐르며 한 명 또는 두 명이 우리와 함께 하는가 했더니 불타는 해가 그 세력을 잃어갈 즈음에 친구들이 왔다.

[가스실]
'화생방' 화학전, 생물학 전, 방사능전의 머릿글자를 붙여 화생방이라고 부른다. 입대하기 전 난 고등학교가 대구 국립대(경북대학교) 옆이어서 갖은 데모(농성)에 시달려왔던 나였기에 왠만한 화생방 훈련엔 무난히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푸른 들판 가운데 화생방 건물이 있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최류탄엔 이골이 났다고 자부한 이 몸이지만 화생방과 엄연히 차이가 너무 컸다. 들판에서 동무들끼리 얘기를 나누다 차례 차례로 가스실로 들어갔다. 궁극적 훈련의 목적을 가스의 위험성과 대치요령을 그리고 전쟁시 적군이 가스로 공격할 때를 대비해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속해 있는 조가 들어갈 차례였다. 막 가스실에서 나온 훈련병은 사전에 지휘관이 지시한 대로 양팔을 벌리고 내리막을 뛰었다. 모두 얼굴은 검게 칠해져 있었다. 나는 방독면을 쓰고 새는 구석이 있는지 실험을 해보고 들어갔다. 학교 교실을 반으로 자른 것 같은 크기였다. 안에는 방독면으로 완전 군장한 조교가 있었다. 한 손엔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서. 제법 무서워 보였고 그렇게 보이려고 쓴 방독면은 사뭇 우리 꺼와 달랐다. 우리는 머리에만 썼는데 조교의 그것은 온 몸을 감싸고 아니 덮고 있었다. 조교의 바로 앞에는 연탄 아궁이가 있었고 거기에는 연탄을 껐을 때 쓰는 '석가탄' 모양이 타고 있었다. 그것이 가스를 만드는 정체였다. 검은 둥그런 물체에서 노오란 가스를 만들어 퍼트리고 있었다. 조교가 방독면을 벗으라고 한다. 군인은 행동이 빨라야 한다. 용감하게 방독면을 벗은 친구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임신한 여자들처럼 헛구역질을 '우엑 우엑'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은 방독면을 벗기를 꺼려했다. 그러자 조교의 길다란 지팡이가 우리를 패기 시작했다. '야 새끼들아, 빨리 벗으란 말이다 퍽퍽' 어쩔 수 없이 나도 벗어야 했다. 그걸 벗자 좁은 공간이라 무지 덥게 느껴졌고 슬프지 않았으나 참기 어려운 공기가 코로 입으로 들어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매캐하고 목으론 따갑고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로 공기는 매웠다.
방독면을 벗으니 본능 적으로 몸을 아래로 굽혔다. 모두가 태워서 나는 가스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러나 조교는 몸을 똑바로 서라고 했다. 우리들 중 한 명이 어디서 들었는지 눈 밑에다 치약을 바르고 왔나 보였다. 조교가 그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얼차례를 받았었다. 여름에 더구나 가스실에서 그런 와중에 조교는 '어머님 은혜'를 부르란다. 결국 리얼하게 눈물을 쏟으며 그 노래를 부르자 조교는 밖으로 보내주었다. 하마터면 문을 향해 뛰어갈 뻔했다. 조교가 막대기는 그때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오면서 양팔을 벌리고 뛰었다. 우리의 얼굴엔 방독면의 검은 자욱이 남아 있었다. 그건 방독면에서 묻은 자욱이었다. 룬대에 다시 가라면 가겠으나 가스실은 두 번 다시 가기 싫은 곳이다.

[유격]
1중대에서 훈련소 입구 반대편으로 가다보면 도중 고속도로를 새처럼 지나간다. 다시 말하면 고속도로를 버스로 지나간 사람들은 한 참을 가다보면 육교 비슷한 것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난 그 육교를 지나온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은 티브에서만 봤던 군인들이 과격하게 훈련을 받던 그 기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철조망이 낮게 설치가 되어 있었고 굵고 길다란 통나무가 서너 개 있었고 그 외 여러 모양의 도구가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남자분 들은 알겠지만 여자 분들은 대부분 모를 것이다. 내가 속한 1 중대 원들은 모두가 알고 있었거나 기대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청소년 수련원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땐 모두가 처음이던 시기라 호기심 반 두려움(?)반 이었다. 그런데 PT체조를 시키는데 이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누군가 피티기는 체조라고 했던가! 앉았다 일어서며 '하나'를 외치고 그 다음 둘 그 다음은 셋 이런 식으로 이십 회를 시킨다. 단 마지막 할 때는 구령을 빼야한다. 그러나 피티가 한 번 하기가 힘이 든다. 자신을 가지고 시작하다보면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그렇다보면 마지막 구령을 해버린다. 그러면 조교는 알고 있었다는 눈치로 다시 피티를 시킨다. 저번 보다 배로 해야한다. 열 번에서 시작하지만 채 몇 십 분이 되기 전에 모두는 지쳐버린다. 그것을 마치면 그제 서야 본격적인 유격을 하게된다. 그런데 유격이란 것이 어찌 보면 재미가 있다. 그런데 하나를 할 때마다 피티를 시키는 것이 문제지만 사실 피티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는 당사자로선 힘들고 귀찮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피티는 늘 긴장을 가지게 한다. 전쟁시는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죽기 싫으면 상대(적군)를 죽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늘 긴장 상태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렇게 연습을 하고 실제 유격장엔 갔을 땐 사뭇 진지하다. 장소는 우리 중대에서 한참을 가야 있었는데 도로로 민간 버스가 다니고 있던 곳이었다. 생각해 보라 군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무작정 대지를 넓혀 나갈 순 없잖은가! 앞에서 말한 사격장(연습하는 곳)도 농토를 지나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 중대는 옷을 갈아입었다. 푸른 제복에서 누더기 제복으로 이유는 유격 훈련을 하면 옷이 건 반 걸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간 곳은 정확힌 모르나 민간인과 인접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긴 내가 있던 부대에서 탈영도 있었다하니 탈영에 대해선 따로 쓰겠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난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다. 유격장 가기 전에도 물을 많이 마셨나 보였다. 유격장에 도착을 하고 소변을 해결하는 시간을 줄 주 알았더니 국물도 없다. 어쩌겠나 날 위해서 소변을 보는 시간을 주겠는가 참아야지
그런데 이번 유격장은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 위로 M-60 총을 쏘고 있지 않은가 M60 이라 함은 거 왜 있잖은가 영화 코만도에서 아놀드 슈욀츠네거가 어깨에 반 정도 걸고 쓰던 총 그리고 웅덩이에서 TNT 폭탄이 터지기도 했다. 그런데 계속 터지는 것이 아니라 한 조씩 출발을 했었는데 두 조가 출발 할 때마다 터지는 것이었다. 하긴 폭탄 가격도 만만치 않을 테니 내 앞 조부터 계산을 했다. 그래놓고 보니 우리 조가 갈 때는 터지게 되어 있었다. 그것도 내 바로 옆에서 이것을 난 운으로 삼았다. 다른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내 차례 난 내가 분대장이 되어 '돌격 약진 앞으로'를 외치면 분대원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남들은 날 불쌍하게 볼지 모르지만 난 알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갔다. 울타리를 건너고 다리를 넘고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웅덩이를 옆으로 지나갈 때 '쿠쾅' 하는 소리가 났다. 내 옆에서 물이 하늘 위로 높이 올라갔다가 땅으로 내리 꽂혔다. 이때를 이용하여 나는 아래로 발사를 했다. 가뜩이나 여름이었는데 물벼락은 나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단지 물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소대장은 물에 빠진 생쥐로 생각하고 날 보았다. 고지에 올라서니 키득키득 소대장은 웃었지만 난 시원했다. 이런 경험도 남자로서 한 번 겪어 봐야 좋을 것이다.
어느덧 훈련기간이 마무리 되어갈 즈음 대충 겪어야할 훈련은 다 했을 즈음 우리들은 말은 없었으나 알고 있었다. 곧 '자대 배치'를 받게 된다는 것을 그러나 조교나 지휘관들은 그런 말이나 조짐 행동은 없었다. 이리에겐 늘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뜻이었는지 더구나 훈련은 계속 되었었다. 느닥없이 내무반 앞에 벽돌이 그득 쌓여있었다. 게중 어떤 벽돌은 덜 건조된 벽돌도 있었다. 만지면 바스락 부서지는. 그런 벽돌을 고르라고 한다. 벽돌을 주우라고 한다. 난 무슨 계획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단단한 벽돌을 들었다. 워낙 급하게 하나를 집었더니 쇳소리가 나는 벽돌이었다. 난 건축과 출신이라 벽돌을 보거나 만져보면 느낌이 남다르다. '이걸로 무슨 공사에 쓰여질까 오랜만에 내 숨은 실력을 발휘해야지'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조교의 말이 가관이었다. '훈련병 여러분은 이제 모든 훈련을 맞쳤다. 이제 맘은 건 가지고 있는 벽돌을 단숨에 깨는 것이다. 만약 깨트리지 못하면 그 훈련병은 깰때까지 해야하고 여기서 남아야 한다.' oh my God '이럴 줄 알았으면 약한 벽돌을 잡을 건데' 하며 다시 바꿀 생각을 했었지만 이제 남은 벽돌은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부숴야 한다 연병장으로 질서정연하게 부대별로 모였다. 연대장님도 우리들의 마지막 시험을 구경하러 나왔다. 난 수시로 벽돌을 땅바닥으로 떨어트렸다가 주웠다. 떨어트릴 때는 부서달라는 마음이었지만 벽돌은 '난 단단한 놈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들리는 건 쇳소리뿐
이러다 나만 남는 거 아냐 그렇게 되면 얼마나 쪽 팔릴까
약 천 여명이 줄을 만들었다. 한 부대씩 앞으로 나가 벽돌을 스피터에서 나오는 구령에 맞춰 '하나 두울 세엣 격파' 일순간 격파한 훈련병들은 기쁨에 '와아' 하고 외치며 뒤로 물러난다. 이젠 내 차례. 내가 속한 소대가 앞으로 나왔다. 난 투덜거렸었다. 그랬더니 잘 해보라는 말뿐이었다. 더러운 자식들. 그런데 내가 그 단단한 벽돌을 부셨다. 주먹이 얼얼했지만 기분은 캡이었다. 나도 모르게 와아 소리치며 뒤로 뛰었다. 고문관 친구는 벽돌도 벽돌 중 고문관(아직 건조가 덜된 벽돌) 벽돌을 만나 나와 같이 와아 소리를 치며 뒤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른 소대들의 격파를 구경했다. 그들 중 벽돌을 부수지 못한 친구들만 남아 다시 도전하고 도전하고 그래서 모두가 격파하는 우리들 중에는 벽돌을 부수는 것에선 고문관은 없었다. 이제 남은 건 보고픈 가족들을 다시 만나는 면회뿐이다. 그 면회를 위해서 아주 기초적인 사열을 연습해야한다. 그 사열은 중대원 들 모두가 일사정열하게 움직이는 모습(걷기)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소대장이 한 말씀하신다. '너희들을 만나기 위해 부모님이 오셨다. 부모님이 너희들을 찾도록 하여라. 절대 너희가 먼저 부모님께 나가지 말아라. 그러면 부모님이 군대에서 너희가 고생만 했을 것이다고 걱정을 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가만히 있었다. 부모님이 우리 진석이 우리 진석이(진석이는 나의 이름이다 이름을 주민상으로 바꿀려면 재판을 해야한다고 들었다.) 라고 말하며 내 앞에서 헤메고 있을 때 난 우스웠다. 부모님은 날씬해진 날 못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날 위해 고기를 구워주셨다. 난 김치가 먹고 싶은데 훈련소에선 고기는 흔하다. 흔하다고 매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기는 자주 먹기에 그립진 안았다. 그러나 김치는 흔하지 못했었다. 군대 김치는 허연 무시에 고춧가루가 몇 개 붙어 있을 정도로 빈약했다. 그렇기에 PX에서 김치 통조림을 사서 먹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김치는 늘 먹고픈 음식이었다.

[ 자대 배치1 ]
면회가 끝이 나고 같은 날에 입소한 훈련병들이 연병장에 모였다. 한결같이 분위기는 다운 되어 있었다. 정이 들었던 아이들은 '우리 제대하면 만나자' 하며 주소나 전화번호가 오고갔다. 나도 고문관 친구가 걱정이 되었으나 왠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땐 정신이 없었다. 더블백을 챙기느라 소지품을 챙기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연병장으로 집합하라는 지휘관의 말에 따라 신속 정확하게 연병장에 모였다. 중대별로.
보지 못했던 버스가 한 두 대 들어왔고 나의 앞자리엔 멋있게 차려입은 헌병이 왔다 갔다 했다. 훈련병 몇 번 앞으로 하며 친구들과 그렇게 헤어졌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 저녁 때였다. 다른 중대의 훈련병들이 우리가 그랬듯 열을 맞추어 버스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모두가 사라졌고 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다시 중대로 돌아갔으며 공교롭게 내가 60일 동안 지냈던 곳이었다. 그리고 내무반장이었던 그 분도 우리에게 전 보단 다르게 대해주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월급이라며 돈을 주었는데 그때까지 알고 있었던 쥐꼬리만한 몇 천 원이 아니라 만원 급이었다. 정확히 얼마였는지 기억은 없지만 아무튼 큰돈이었다. 하지만 군인으로서 적지 않은 돈이었음은 확실하다. 우린 무질서하게 아무 자리에 누웠었다. 하지만 잠을 잘 수 는 없었다. 불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 정확히 일곱 시경에 눈이 떠졌다. 60일 동안에 몸에 배인 탓이리라. 서서히 식당을 향해 걸었다. 옆에서는 막 입대한 녀석들이 줄을 맞추며 걷는 모습에 그래도 먼저 온 탓에 훈계를 하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중대원들은 정해진 대로 그저 순응하면 밥을 갔다 주었으나 우리에겐 중대는 없다. 누가 줄 것인가 고민하다 갖 새로들어온 훈련병들에게 빈대를 붙어야 했다. 그때의 처참한 기분. 아니 그런데 훈련병들의 음식이 하나의 충격이었다. 내가 아니 우리가 있을 때에는 짠밥이더니 얘네들은 비록 어정쩡 했지만 햄버거였다. 역시 부족한 면이 있지만 수프가 있었다. 짠밥 대신에 햄버거와 수프 젠장 이런 환경이 주어진다면 훈련소에 남으라고 한다면 남겠다.
식사를 마치고 흐느적 흐느적 중대로 돌아왔으나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내무반장은 아무 일 없이 있는 우리를 우리나라 아니 아시아에서 최고로 크다는 세탁 공장으로 데려갔다. 과연 규모 면에서 아시아에서 단연 으뜸이라 할만했다. 우리는 모포를 원형 세탁기에 넣고 세탁이 끝나면 어거지로 돌아가는 세탁기를 우리들의 손 힘으로 멈추게 해야했다. 얼마나 빨리 회전을 했으면 뽀송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세탁기에서 흘러나오는 배출물은 황토빛 이었다. 내 어렸을 때 경북대 산으로 알고 초등학교(그땐 국민학교) 과제물로 찰흙을 구해오라고 하면 번번이 경대에서 퍼왔었다. 꼭 그런 날엔 엄마에게 무지 혼이 났었는데 바로 옷을 더럽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도 내 옷에선 누런 흙빛의 물이 대야에 남아 있었는데 군대에서 군복이 아닌 모포에서 저렇게 나오는데 군복에선 얼마나 나올까 하지만 군복은 거기 기관병이 빨았을 것이다. 여름이라 모포는 금방 건조가 될 것이었지만 우리들은 모두 사타리에 습진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씻지 못했으니 중요한데 피부가 늘 젖어 있었다. 그러니 결국 습진이 걸릴 수밖에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모두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 다리를 옆으로 벌린 채 햇볕에 도움을 청하곤 했다.
내무반으로 돌아와 낮에 햇빛에 구웠던 중요한 부분을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새로운 계급장을 받아 거기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다시 찝찝한 바지를 입어야했다. 계급장은 노오란 짝대기 하나가 아니라 까아만 짝대기 하나였다. 우린 연무역으로 갔다. 우리가 탄 기차는 비둘기 호 우리나라에서 제일 느리다는 기차였다. 연무역에서 탔을 때부터 민간인들과 함께 있었다. 난 예전부터 움직이는 것 그러니까 버스나 택시, 기차 이런걸 타면 난 주로 차창을 통해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심취해 있어서 우리가 어디로 가는 지 관심이 없었다. 설사 관심을 가졌다고 한들 어찌 나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겠는가
기차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무반장도 '이젠 작별할 시간이 다가왔다. 몸조심 하거라' 왜 이런 불길한 말을 남겼는지 우리가 기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알았다.
우리가 내린 곳은 광주였다. 광주! 나 같은 경상도 사람이 깽깽이 라고 불리던 전라도에 왔으니 앞이 캄캄했다. 우리는 백 명이 조금 더 댔다. 다시 군기가 바짝 든 상태에서 이름 모를 역 앞 광장에 모였다. 미리 우리를 데려갈 부대에서 몇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높은 계급(아마 경감급)의 남자가 하는 말에 따르면 '지금 불리는 사람은 겁나게 운이 좋은 놈이다' 하며 몇몇을 불렀다. 그들이 간 곳은 전경대였다. 나는 재수가 없다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난 울산 출신의 덩치 큰 사내를 동기로 해남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지프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같이 온 사람에게 목포에 일이 있어 목포를 들렀다 가자고 했고 결국 난 목포를 가게 되었다. 난 동기에게 말했다. '야, 우리가 해남으로 간다고 하는데 너 해남을 아나?' 난 그때 해남이란 도시이름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선 동기도 마찬가지였다. 난 목포에서 커다란 배에 승용차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배의 규모를 짐작했다. 너무나 컸기에 승용차를 삼킨단 말인가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태양은 보이지 않았고 그 대신 칠흙 같은 어둠을 지프차의 헤드라이트로 헤집으면서 해남으로 달렸다. 아무런 변화는 없어 난 잠이 들었다. 참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동기는 군기가 들어 있었는데 말이다.
해남! 해남! 난 이곳에서 나의 인생에 짧은 변화의 씨앗을 품게 되었다. 먼저 고참들의 이유를 만들어 군기를 잡는데 그때 내가 얼마나 가슴을 맞았는지 뭐 얼굴을 때리면 표가 난다고 가슴을 때린다나 쫄다구로서 고참의 구타는 미리 계산된 것이었다. 이쁘다며 만지고 때리고 꼭 나와 동기 둘이서 함께 맞았다. 우린 동기니깐. 해남에 가서 바로 위 고참을 따라 목욕도 경찰서 뒤 조그만 거긴 경찰서에 필요한 물水이 큰 통에 들어있었다. 샤워 기는 필요 없었다. 그냥 바가지로 끼엊으면 그만인 것 을 그리고 그 임시 목욕장 가기 전에 구내식당입구 옆에 공중전화가 날 좀 쓰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아 왠지 나의 눈이 공중전화로 향했다. 그러자 고참은 전화를 하라고 한다. 동전이 없음을 안 고참은 수신자부담으로 전화를 걸게 해주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무척 들떠있었다. 하긴 내가 전경으로 전라도 해남에 있다고 말하자 엄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 것이다. 전화기 너머 엄마의 마음을 이해 못한 부끄러움을 그땐 몰랐었다. 얼마나 놀랬을까 그저 미안한 맘뿐이다.
내가 있던 곳은 '오전대' 라고 불렸다. 상황이 발생하면 오분내로 출동한다고 해서 오전대. 오전대에 있으려면 암기사항을 외워야 했다. 나주에 안 사실이지만 모든 부대에는 암기사항이 있다고 들었다. 어쨌거나 암기사항은 정말 싫었다. 위로 내무부장관에서 시작해서 전남 경찰총독 해남서장에서 시작해서 고참들 이름을 외워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름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면 낭패를 본다. 고참은 대략 사십 명 정도 된다. 기가 막히는 건 그들이 경찰서에 없다는 점이다. 가까이 순천으로 동원간 사람이 너댓명, 지서로 파견된 사람이 너댓명 또 기가 막히는 건 섬에 있을 고참들이었다. 해남은 우리나라 최남단이고 가까이 완도와 진도가 인접해 있다. 얼핏 들은 바로는 완도와 진도에 속한 섬이 대략 마흔 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니 해남에도 속해있던 섬이 있었다. 그중 금호도, 녹도, 어불도, 대충 여기까지 생각이 난다. 난 그 중 어불도로 발령이 났었다. 고참들의 주로 사용하는 구타방법은 가슴을 때리는 것이나 발바닥을 때리는 것 난 어처구니없게도 둘 다 경험했다. 멀리 동원 갔던 고참들이 오전대로 오는 날이면 오전대 대원들은 바짝 긴장을 한다. 오전대 출신이라면 서로 안면을 터득한 탓에 화를 자제했었지만 동원 갔다가 돌아온 대원들은 그들도 서로 서뭇했으리라 오전대 왕 고참이 무슨 이유로 모두를 모이라고 했다. 그때 왕 고참은 모두에게 매를 대지 않는다. 단 바로 아래 기수의 졸병을 매로 다스리면 그는 또 아래 매의 수는 두 배로 불어서 그러니 졸병들은 어떻겠는가 날 세워놓고 훈계를 했다. 이 훈계가 끝이 나면 기합이었다. 동기는 원채 덩치가 있던 녀석이라 주먹으로도 몽둥이로도 끄떡없었으나 난 체구가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더구나 고참의 손은 커다란 부채를 연상할 만큼 컸었고 덩치 또한 컸었다. 퍽퍽퍽 욱욱욱 맞아도 자세가 흐트러지면 아니 되었기에 맞음과 동시에 관등성명을 말해야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었다. 처음엔 몰랐으나 자꾸 맞을 때마다 하늘로 붕 뜨는 느낌이 들었었다. 난 쓰러졌고 뒤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쓰러졌기에 코가 무지 아팠었다. 내가 쓰러졌을 때 내무반은 발칵 뒤집어 졌다한다. 하긴 맞은 사람이 눈동자에 온통 눈을 연상할 만큼 흰자만 보였다고 하니 내무반 고참들은 위에서 간찰이 오지나 안을 까 해서 더 그러한 것 같았다. 그러다 발령을 낼 때 날 섬으로 쫒아내더라. 날 보기가 싫어서 이겠지 고참들의 말로는 다들 날 부러워했지만
내가 오전대에 있을 때 고참의 행동을 하나하나 잘 봐야 했다. 고참이 담배를 입에 가까이 했을 때에는 작은 접시를 재떨이 대신으로 고참의 담뱃재가 떨어지기 전에 고참의 앞에 갔다놓아야 했다. 고참은 장난삼아 담배를 입에 무는 척 하면 졸병인 나로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들고서 고참의 앞에 가야했다 그러나 내가 접시를 들고 가면 금새 담배를 숨기는 것이다. 고참들이 병아리 같은 신병이 귀여워서 그러했겠지만 유별난 고참을 만나게 되면 집합을 수시(고참의 기분에 따라)로 집합을 해야했고 그럴 때면 그 고참의 후임병들은 말뚝처럼 제 자리에 붙박혀 있어야 했다. 얼마나 식은땀이 흐르던지! ! !
또 암기사항은 세월이 나 같은 돌대가리도 외울 수 있었다. 그때 순천으로 동원갔다가 온 고참이 있었는데 덩치는 산만했다. 온통 근육질의 몸이었다. 그 고참은 좀 조용한 편이었지만 잠제된 성깔이 터지기 시작하면 졸병들은 거반 개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같이 정문근무를 할 때 내가 말을 걸었다. '김 수경님, 여동생 있습니까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아시다 시피 군대 생활이 얼마나 외로운 건지 아시지 않습니까 김 수경님은 곧 제대니 그런 걱정은 하시지 안 겠지만요 부탁합니다.' '그래? 내 동생은 있지만 갠 콧대가 높거든 아마 힘들걸' 난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 서울의 그녀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난 진지하게 편지를 썼다. 아마 그때도 난 글 솜씨가 있었는 것 같았다. 답장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신학생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내게 간섭을 하시는 거였다.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녀는 낮에는 일을 하는데 그녀의 직장은 호텔이었다. 호텔에서 전화를 연결해주는 그런 일. 난 자주 편지를 했고 광주로 동원을 가서도 수신자부담으로 전화를 하곤 했었다. 이렇게 난 임기응변으로 고참의 눈에 들었다. 하지만 그 고참은 곧 제대를 했다.


[ 섬 생활 ]
앞에서도 밝혔지만 때는 여름철이었다. 비가 억수로 많이 내리던 날에 섬으로 지서에서 출발했다. 내 어깨엔 카아빈 총을 메고서 지서장이 총을 내게 주면서 당부를 했다. 총과 총알을 잃어버렸다간 영창이라고 그래서 난 총에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섬으로 가기 위해서 육지의 선착장으로 갔다. 비는 계속 내리고 하지만 여름이어서 비는 시원했지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배를 '부르릉' 자동차의 엔진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육지에서 바로 코 앞에 보이던 섬이 어불도란다. 내가 배에 타자 다른 사람들도 탔다. 그들은 섬 주민들이었다. 비를 맞으며 서로 반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정겨운 외갓집 할아버지를 연상케 했지만 비와 바람 때문에 낭만에 젖어 있을 순 없었다. 더구나 내겐 총과 실탄이 있지 않은가
큰 배였지만 파도에는 너무나 힘이 없는 존재였다. 작은 모터보트가 지나가면 내가 탄 배는 춤을 추어야 했다. 비는 오지 바람도 비와 장단을 맞추어 불지 배는 흔들리지 난 옆의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다라이)에 기대었지만 그 큰 다라이도 배의 흔들거림에 장단을 맞추어 같이 좌우로 흔들렸다. 지서에서 같이 온 직원은 날 걱정했지만 내겐 재미로 느껴졌다. 경주에서 맛보았던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었으니 뭐가 두렵겠는가
섬은 TV에서 봤던 책에서 봤던 그런 풍경이었다. 낮에 본 모습은 또 다른 환상을 만들었다. 너무 멋이 있었다. 날이 밝자 난 세수를 물탱크에서 물을 받아 했고 난 착실히 준비해간 부식물(쌀)을 가지고 냄비에다 물을 붓고 손바닥을 냄비에다 넣어가며 물 높이를 조절하고 연탄 아궁이에다 올려놓으면 끝이다. 그리고 운동 삼아 파리를 잡았다. 내가 있던 곳 그러니까 경찰서 전경 대원이 있는 곳을 출장소라고 하는데 경찰을 푸대접했으리라 그러니 쓰레기장 옆에다 출장소를 만들어 줬지. 무더운 날씨에 쓰레기와 짝이 맞는 파리가 얼마나 극성이던지 난 심심하면 파리를 잡았다.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이 나타나는 파리들. 난 방에서 날고 뛰기를 여러번 하도 많아서 나의 팔짓 손바닥이나 노트(출장소엔 두 개의 케비넷이 있었으며 케비넷 안에서 고등학생 교과서가 있었다.) 같은 것으로 사냥(?)을 즐겼다. 그렇게 설쳐대면 내 방바닥에는 파리의 무수한 시체들이 널려있었다. 그러면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고 이렇게 첫날을 보냈다. 둘째 날 난 섬을 탐험하기로 했다. 난 군軍용 수통을 들고나섰다. 출장소의 뒤에는 작은 동산이었는데 무심코 올라 간 적이 있다. 운동 삼아서 말이다. 그러다 무수한 진달래를 발견했고 진달래를 먹어보았다. 맛? 야간은 달았다. 즉 먹을 만 했다. 다시 수통에 물을 채우고 출장소를 나왔다. 손엔 어불도 지도를 들고서 헤헤 로빈슨 크로스 같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보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지만 좁은 섬에서 딱히 내가 가야할 길은 뻔했다. 길이 하나뿐이니 출장소는 섬의 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명색이 일종의 지서인데···
출장소 맞은 편엔 꼬딱지만한 섬이 있었고, 반대편을 보니 교회가 있었다. 난 교회를 보자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여기도 사람이 산다고 예수쟁이들의 손이 뻗쳤구나 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이런 오지에도 복음이 오는구나 할렐루야 섬엔 가게도 있었고 학교도 있었다. 그리고 우물도 그 우물을 보자 갑자기 갈증을 느껴졌다. 두레박은 항상 그 자리에 물이 필요한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열어주고 있었다. 두레박을 던지니 풍덩 하는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외갓집에도 우물에서 물을 길었었다. 난 능숙하게 물을 길어 올리고 두레박에 입을 대고 마셨다. 얼마나 시원한지 끄억 하고 트름을 하자 '그물 겁나게 시원하제잉?' 날 놀라 그만 들고 있던 두레박을 하마터면 땅에다 떨어트릴 뻔했다. 노인이 우물 맞은 편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날 보자 출장소 대원임을 알고 너그러운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난 얼결에 허리를 구십도로 숙여 인사를 했다. 내가 다시 걸음을 재촉할 때 '그럼 이따 보자고잉.' 난 다시 예 예 하며 인사를 드렸다. 조그만 학교(분교) 가기 전에 새하얀 건물을 지나쳤다. 윗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니 섬의 반대편이 나왔다. 정말 아름다웠다. 아래로는 기암절벽, 옆에 낀 자그만 해변 바로 앞엔 망망한 바다, 그 바다 위 보기엔 작지만 실제론 엄청 큰배가 바다를 유유히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난 본능적으로 산(아니면 언덕)쪽으로 계속 걸었다. 뭐하나 유심히 보고자 한다면 오늘로 끝을 내긴 힘들 것이다. 그런 생각에 걸었었다. 자세한 것은 내일 다음으로 미루고서.
섬의 중간이라 생각되는 곳에 오똑선 나무가 있었다. 나무에는 피가 묻어 있었지만 여기서 개를 잡았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난 지금도 애완견을 키우고 있다. 다시 걸음을 계속하니 사람이 자주 다녀서 생긴 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양 옆으로 숲이 우거져 있었다. 밤에 온다면 귀신이 나타날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땐 난 귀신을 믿지 않았었다. 조금 걸어가니 갑자기 사방이 훤했다. 조금 전 지나왔던 곳과 마찬가지로 바다가 보이고 반대편엔 섬이 한 눈에 보였다. 그리고 거긴 영어로 H 자를 하얀 돌로 박혀 있었고 그 둘레를 역시 하얗게 둥근 원을 그리고 있었다. 여긴 헬기장 이었다. 비상시에 쓸. 계속 걸어가니 울타리가 나타났다.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긴 하나의 군부대였다. 아마 방위가 있거나 오래 전 전경이 있었을 것이다. 내무반이 반 지하로 있었고 기울어진 연병장에 식당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문득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다. 만약 여러 명의 군인들이 있었다면 식수를 어떻게 해결했을 까 그런 궁금증으로 주변을 살폈다. 나의 코가 예민해졌다. 바다와 접해 있으니 물 냄새를 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한 가닥 희망을 걸고서 주변을 살폈다. 역시 내 직감이 맞았다. 양수기를 설치했던 흔적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이 아래에 뭔가 있을 것이다란 확고한 생각에 산을 내려왔다. 우와 물이다. 물이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가둬두는 곳이었다. 섬에선 빗물은 육지의 수돗물과 같았다. 섬 사람은 우물도 있었지만 이 우물도 여름이나 가물때에는 물을 구하기는 사하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한아름 크기의 둥그런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둬두는 곳 거기서 양수기로 군부대로 퍼올렸을 것이었겠지만 난 목이 긴 말처럼 입을 갔다 대 마셨다. 더운 날씨에 그 시원함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장소는 옆에 내가 기대를 했던 교회의 옆이었다. 교회는 섬에서 출장소의 정 반대편에 있었지만 직선거리론 약 백여미터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출장소로 갈려면 해안으로 걸어서 가야했다. 삶에 지친 사람처럼 발걸음을 터벅터벅 걷지는 않았다. 내겐 바다가 좋았고 맑은 바닷물은 나의 가슴에도 맑은 마음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난 교회를 찾아가진 않았었다. 뭐랄까 난 아직 메여있고 싶진 않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결국엔 하나님 없인 살지 못하는 신세가 될 줄은 그땐 몰랐었다.
다시 난 교회 옆으로 바닷가를 걸었다. 출장소까지. 섬에서의 밤은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육지 그 중에서도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에는 밤은 낮은 연장이거나 전혀 새로운 시간이었다. 낮엔 햇님이 밤엔 달님이 빛을 발산하기를 바랬으나 다음 날 비가 올라치면 전 날 밤엔 달 구경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섬에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네온싸인의 빛이 없다. 쉽게 표현하자면 어둠뿐이었다. 그래서 후레쉬가 섬 사람들에겐 필수였다. 해가 떨어지면 밤이었다. 출장소로 돌아 왔다. 캐비넷 위에는 본서에서 상황을 위한 무전기가 케비넷 위에 있었다. 아침이면 본서에서 상황 점검을 위해 무전이 오지만 그때뿐이었다. 난 무전기에 신경이 써였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다시 출장소로 돌아온 나는 물걸레로 방바닥을 닦았다. 난 혼자 살지만 청결 주의자였다. 여러 명의 발 소리가 들리더니 우르르 집(출장소)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내 방은 출장소 옆문을 열면 바로 내 부엌이었고 부엌엔 몇 개의 냄비가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신세였다. 그 문으로 마을 청년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날 만만하게 보고 들어온 것이었지만 난 생각을 다르게 먹었다. '편해서' 라고. 하긴 내가 이 섬에서 얼마동안 있게 될지 모르는 판국에 주민들과 사이좋게 지내서 나빠질 건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여섯 명이었는데 모두의 공통점이 있었다. 사람마다 소주 대大 병을 들고 왔다는 점이었다. 난 그들을 고참대우를 했다. 그들이 온 이유는 나 아니 경찰과 친목을 다지자는 이유에서였다. 말이 친목이지 누굴 죽이려고 하나 라는 생각을 가졌지만 내가 그 날 마신 소주만도 네 병은 마셨을 것이다. 그것도 큰(大병)걸로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해도해도 너무 뻥이 심한 거 아니냐고 독자는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사실인걸 어찌하란 말인가! 내가 잔이 될 만한 걸 내놓자 그들은 우릴 우습게 보느냐며 밥그릇으로 부어 마셨다. 안주? 내가 안주를 준비할 껀덕지가 있겠는가 안주는 자기네들이 배에서 몇 마리의 생선으로 회를 만들어 먹었다. 도미 회, 세발낙지 회, 이름 모를 생선으로 회를 방바닥은 물고기의 시체가 즐비했다. 이상하게 그렇게 마셨어도 취하지 않았다. 그때 안 것이 안주에는 바다에서 나온 것으로 해야 술에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 중 재만이(가명)란 사람이 이 청년회에서 파워가 있는 사람 같았다. 그는 이 야밤에 장어를 잡으러 가잔다. 몸만 오라기에 나도 그의 배에 올랐다. 그는 낚시 도구를 집으로 돌아갔고 올 때는 왠 여자와 같이 왔다. 난 재만씨를 형이라 불렀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곧잘 '형'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했고 그와 동시에 '삼촌'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그 형을 따라 난 배에 올랐으며 낚싯대는 없었다. 낚싯줄 뿐 미끼는 갯지렁이. 그런데 난 갯지렁이와 친하지 못했다. 육지에 지렁이는 그냥 한 일'一'자 모양이었지만 갯지렁이는 지네와 흡사했기에 만지는 것조차도 꺼려했다. 낚시의 방법은 의외로 지극히 간단했다. 원 기둥 모양의 쇠막대에다 갯지렁이가 달린 낚싯줄이 있었고 그걸 배 바깥으로 내려놓으면 쇠막대의 무게로 바다 밑으로 떨어진다. 그러면 그 줄을 잡고 위로 아래로 하면 장어는 뭐 이런게 다 있노 하며 지렁이를 문다. 그렇게 해서 장어를 잡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혹 TV에서 봤을 것이다. 푸른 바다 위에 고무공 같은 것이 어떨 땐 줄을 지어 무수히 있는 것을. 그것의 정체는 '뷰표'이다. 지방마다 부르는 이름에 차이는 있지만 쓰여지는 이유는 똑 같다. 무수히 많이 있으면 김 양식을 위한 것이지만 홀로 버티고 있는 것은 그거 밑에 고기가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유인도 부근에 있다면 낚시의 도구로 쓰여지는 게 많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재남이 형의 배에서 난 여자와 얘기를 나누는데 시간을 허비했다. 그녀는 뚱뚱 했으며 현재 어불도 보건소 소장이란다. 집은 광주이고 어불도는 계약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름은 이미선(가명) 이라며 앞으로 자기를 부를 때 '소장님' 이라고 불러주길 바랬다. 그녀와 나는 공통점이 있어 그녀와 나 사이에는 모두 국가에 메인 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복지부 나는 내무부. 또 있다 그녀는 광주출신 나는 대구출신. 왠지 정이 갈 것 같았으나 난 그녀를 외면했다. 다음 날 출장소에서 막 아침을 먹었을 때 출장소의 위치 상 섬의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왕래가 잦았으며 그런 왕래가 있는 중 한복을 입은 그녀가 왔다. 난 방으로 안내를 했으며 물이라도 줄 수 없었다. 컵이 있나? 그렇다고 그릇에다 물을 주기는 좀 그렇고 그녀가 날 보며 말했다. '몇 학번이세요?' 난 학번이 무언지 모른다. 그래서 군번을 말했다. 대학 물을 먹어보지 못했으니 학번이 뭔지 어떻게 알겠나. 그녀는 내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런 문제는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얘기로 두어 시간을 보냈었다. 그땐 난 말에 유창했었고(아버지를 닮아서) 내 말을 듣는 사람에게 늘 웃음을 안겨주었다. 여자를 포섭하는 건 대구에서 익혔었고 피라미드 회사에 다녔을 때 난 말을 유창하게 하는 법을 배웠었다. 모두 '거짓말' 이긴 하지만 그땐 내 언변엔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그땐 거짓말을 했었고 지금은 거짓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유창한 말에 그녀는 나에게 호기심을 가졌었나 보였다. 날 보건소로 초대를 했던 것이다. 난 그 날 저녁에 보건소를 찾았었다. 보건소 앞에는 재남이 형의 집이었다. 하지만 재남이 형은 아침이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가고 집에 와서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내일을 위해서 쉬어야 했다. 보건소는 깔끔했다. 역시 여자가 있는 집이라 그런지 몰라도 헤헤.

[ 그녀는 처녀였다. ]
내가 중학생 일 때 남자 선생님이 교실에 와서 성교육을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남자의 정자가 여자의 난자와 만나 비로서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선생님의 수업이 끝나고 질문이 있나 라고 말씀하실 때 난 손을 버쩍 들었다. '샘님, 모르는 게 있습니데이 선생님의 말씀 이해는 가는 대예 어떻게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지예?' 갑자기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난 그땐 아이들이 왜 웃는지 몰랐었다. 그만큼 난 순진했었다.
내가 보건소에서 밥을 먹었으며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나의 순진함에 반했었나 보였다. 그녀의 방엔 여러 가지 책이 많았었다. 난 그녀의 집(보건소)에 갈 때마다 책을 여러 권 빌려보게 되었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며 난 나도 모르게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그녀는 뿌려치지 않았었고 바깥은 벌써 해가 떨어져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난 자연스레 그녀가 깔아준 이불 위에 누워서 본격적으로 그녀의 가슴을 만지기도 애무하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옷을 벗겼고 그녀를 안았다. 우리의 몸은 서로를 원했고 받아들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겪어 조는 것이었다. 그 후로 난 여자의 뭉클한 가슴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지병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몸이 자꾸 불었다고 했다. 보건대학교에서 4년 전액 장학금으로 다녔지만 성적이 좋아서 장학금을 받은 건 아니었다. 당시 장학금을 학교에서 주면 얼마의 기간 안에 받은 액수만큼 돌려줘야 한다고 했다. 그녀가 공무원 시험을 쳤을 때 의무적으로 낙도에서 봉사해야 했기에 그녀는 어불도를 택했다고 했다. 난 어스름이 서서히 사라져 갈 때 출장소로 돌아왔다. 출장소로 와서 무전기를 받아야 했으며 다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깰 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 가져본 경험. 다시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보건소로 뛰었다. 머리 속에선 그녀가 날 무척이나 반가워하리라 생각했었으나 날 보는 그녀의 눈빛은 좀 냉랭했다. 보건소 바깥에 빨랫줄에 어제의 이불이 걸려 있었다. 가운데만 빨고서 그래서 유독 그 부분이 돗 보였다. 이불엔 핏자국이 있었다. 난 한 여자의 순결을 뺏은 거였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키스를 나눴었다. 그것도 프렌치 키스를. 난 키스하는 법을 그녀에게서 배웠다. 내가 입을 마주하고 있을 때 그녀는 내 입 속으로 혀를 내밀었다. 서로의 혀가 들어갔다 나왔고 그러며 빨아주고 내가 혀를 그녀의 입 속으로 내밀면 그녀가 빨아주고.
보건소 옆엔 이름 모를 무덤이 있었는데 난 그 무덤에서 자주 누워있곤 했다. 따스한 햇살이 날 간지럽힐 때. 미선이와 우린 자주 몰래 만났었고 그러면 여지없이 키스를 했고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우린 자주 섹스를 했었다. 하지만 죄책감은 모르고 있었다.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원했고 사랑했으니까. 출장소엔 가끔 신문이 온다. 광주일보와 무등일보 난 신문을 통해서 책을 찾았었고 그리고 그녀를 통해서 사 봤었다. 아 고마운 사람
그러는 어느 날 내가 매운탕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미선은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고 호기심에 찬 눈으로 혹시 남자가 살림을 망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난 미선의 아니 보건소의 주방에서 예전 고등학교의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기억을 더듬어 만들기 시작했다. 재료는 재만이 형님이 준 도미 두 마리 매운탕은 재료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행이 도미는 생각보다 덩치가 있는 놈이었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매운탕을 만들었다. 먼저 우와 제성씨 잘 한다 라고 말해 날 추켜 세워줬다. 맛을 보더니 땀을 삐질삐질 흘러가며 간혹 물을 마셔가며 다 먹어버렸다. 여자가 그 뜨겁고 매운 것을 다 먹기야 했으랴 배가 불렀던지 냄비 채 먹고 남기더니 재만이 형에게 먹여보아야 겠다며 큰그릇으로 냄비를 덮었다.
참 미선은 교회에서 선생님이었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유년부 교사였었다. 그리고 섬에 있은지 몇 개월이 흐르자 나도 교회에선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다. 더구나 세례까지 받았다. 세례가 주는 의미는 난 방황하는 옛 죄인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피로 다시 삶을 의미했고 동시에 천국 백성임을 확정짓는 의식이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광주로 동원을 갈 때 내 귓전에 내가 기도할께요 라는 말을 했을 땐 별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광주 민자당 당사 경계 근무를 하고 있을 때 사과탄을 내 손 안에서 터졌었다. 사과탄은 사과 모양의 최류탄이었다. 슈류탄을 던질 때에도 자세 또한 격식을 찾았었는데 그만큼 위험한 물건이었다. 이것이 터지면 부근 최소 주변 5미터에 있는 물체는 피해를 입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손에서 터진 거였다. 같이 경계 근무하던 고참들은 매운 공기를 참아가며 내 손을 걱정해 주었다. 폭탄이 손에서 터졌으니 손은 보나마나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야 했겠으나 내 손은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그때 순간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내가 기도해 줄게요' 미선의 말이 떠올랐다. 옆에 있다면 안아주고 키스를 해줬을 것이지만 내 옆엔 미선이 아닌 고참이 담배를 물고 있었다. 경계 근무를 마치고 공중 전화로 뛰어갔다. 그리고 미선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다. 우린 그녀가 집으로 오는 주말에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토요일이면 내일 그래 그 날은 금요일이었어. 13일의 금요일 그 날이 13일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문득 13이란 숫자가 생각이나서 써본 것 뿐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은 내가 스릴을 좋아한다고나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다. 주말에 그녀가 민자당사 앞으로 왔다. 그녀는 도로 건너편 지하 다방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난 고참에게서 외출 허락을 받았고 옷도 작업복(군복)을 벗고 민간 옷으로 갈아입고 다방으로 갔다. 다방엔 군기 빠진(다른 서의 고참) 사람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미선은 나에게 손짓으로 어디에 있음을 표했다. 난 미선의 곁으로 빠른 동작으로 갔다. 곧 이어 문으로 '여∼ 문 일경 애인이 왔다며.' 라고 말하며 들어왔다. 그 소리에 미선이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난 어불도 보건소 소장이라고 말했다. 미선은 그들 앞에 커피를 주문했고 그들은 겉으론 미안한 기색을 표현했지만 속으론 좋아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난 고참에게서 주의 사항을 듣고 외출을 나갔다. 고참은 내가 미선이와 관계를 보이지 않게 하기를 원했다. 원래 군인에게 있어서 외출이나 외박은 으레 그런 관계를 가진다고 했다. 난 아직 광주의 지리를 모르는 탓에 그녀가 앞서는 대로 뒤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그녀의 집 부근에서 내렸다. 해는 벌써 누워있었다. 미선과 난 무등산을 향해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그녀는 나와 팔짱을 원했으나 나의 손은 그녀의 어깨 아래 젖무덤을 만지며 걸었다.
내가 간 곳은 그녀의 집 그녀는 날 부모님께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만나보고 알아보라는 준비한 자리였다. 하지만 난 아직 어리석어서 그런 자리에 맹숭맹숭 있다가 나왔다. 먼저 난 그녀보다 어렸으며 그렇기에 여러 면에서 난 그저 부족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난 그녀의 집에서 밤을 보내지 않았다. 정확히 못한 것이지.
그런 내가 다시 어불도로 왔다. 당시 난 책이라면 무조건 읽기 시작했다. 난 무엇보다도 책을 좋아하며 문서로 된 것은 모두다 좋아한다. 섬에 있을 때 난 무지 외로웠다. 그래서 너무나 심심해서 케비넷을 들쳐보니 고등학교 생물책이 보였다. 난 그것을 읽으며 그나마 외로움을 떨칠 수 있었다. 그리고 오전대 고참은 모두가 대학생 출신이다. 그들은 약간의 짬이 있으면 신문이나 전공서적을 보았다. 난 짧게 오전대에 있었지만 고참들의 여유의 시간에도 뭔가를 책을 통해서 얻으려는 모습에 반했었다. 그래서 난 내게 자유가 주어지면 책을 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섬으로 발령을 받았으니 내 의지는 아니지만 그런 계기를 통해 책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할 수 없으랴! ! ! 그 의지로 대학을 가고 싶었다.
첫 번째 동원이 끝났을 때 해남으로 버스를 통해 돌아왔다. 그때 섬에 있을 미선이가 무척 보고 싶었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만들어 그 날 저녁으로 섬으로 들어갔다. 미선이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섬에 오르자 보건소로 향했다. 우린 다시 만났으며 길고 긴 키스를 나누었다. 내가 미선을 그리워한 만큼 미선도 날 그리워했단다. 그 날 밤을 뜨겁게 보내었으며 식사(아침)도 먹었었다. 우리의 관계를 주변 사람들이 의심을 했고 급기야 목사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으흠, 제환 형제와 소장님 너무 가까이 지내는 거 아닙니까!" "전 보기 좋은대요." 사모님이 받아 쳤다. 그 날 우리는 교회 마당에서 밤을 보냈는데 그 이유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도란도란 군에서 겪은 일과 대구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듣는 사람은 교회 중고등부 였지만 아직 고등학생이 없는 관계로 중학생들에게 내가 얘기를 전해주어야 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땐 한 말 빨 했었고 내 얘기를 듣는 사람은 지루한 줄 몰랐었다. 밤이 길어지자 한 두 명씩 집으로 돌아갔는데 마지막으로 나와 미선이만 남게 되었고 둘이서 집(보건소)으로 가야했다. 해변 길은 물이 불어서 벌써 바다에 갇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결국 난 미선의 안내로 산 쪽으로 올라갔다. 우릴 지켜보는 것은 초롱초롱한 별 뿐 아무도 없었다. 난 가는 그녀를 세웠다. 그녀는 순순히 멈추었다. 그때 우리의 위치는 한쪽은 바다요 다른 한 쪽은 경사가 심한 낭떠러지 였다. 미선은 길에 서있고 난 옆에 섰다. 그 자리가 얼마나 위험한 자리란 것은 그땐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긴 키스는 시작되었고 오랜 시간동안 행해졌다. 그때의 짜릿함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다 후회뿐인걸
두 번째 동원에서 난 전남 도청에 머물러 있었다. 항상 대기상태로 있어야 했다. 훈련소에서 가져온 너무나 작은 파란 성경책 내게 있어 시간은 가만히 있으면 무료한 시간이겠지만 나는 늘 책을 읽는 습관이 군에서 가지게 되었다. 그땐 성경을 완독을 했었다.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언젠가 읽을 책이었기에 그리고 난 제대를 한지 몇 년이 지났어도 성경을 본다. 이래저래 읽은 것만으로도 4독을 했으며 5독이 다가오고 있다. 하루에 성경을 읽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영에 도움이 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 동원에는 미 문화원 경계 근무를 했다. 미 문화원은 호신대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미국에 감정이 많았던 대학생이 호남신학대학교에서 두더지처럼 잠시 있다가 갑자기 화염병을 미 문화원에다 던지고 다시 학교로 도망가 버리면 우린 어쩔 수 잆었다. 그 큰 호신대 캠퍼스를 다 뒤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속한 해남만이 아니고 진도나 완도에서도 동원이 되었기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동기들을 알게 되었었다. 이런 건 좋았으나 우리의 숙소는 문화원 옆에 알루미늄으로 설치된 막사에서 여러 서에서 온 전경들이 늘 상황을 대비해야 하므로 방석복(옷은 두꺼운 국방색이며 옷은 대나무로 앞과 뒤가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왠만한 충격에도 무난히 버텨낸다. 옷의 무게는 상당했었다.)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소변을 문제가 아니 되었지만 대변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왠만하면 대변은 참아야 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경우가 항 상 있게 마련이다. 근무가 끝난 시간이라면 방석복을 벗고 활동하기 편한 체육복을 입지만 대부분 참지 못할 경우가 있다. 하필 근무시간에. 어쩌랴 근무 도중 나와 숙소에 배치된 화장실에서 대변을 봐야 했다.
뱃속에서 채이고 채여 있는 대변은 그야말로 돌 똥이었고 한 번 싸기 시작하면 끝을 본다는 신념으로 오래 쪼그리고 앉아 있다보니 자연스레 치질을 달고 다니게 되었다. 하루빨리 따뜻한 물에다 좌욕을 해야하지만 군바리가 어디 그런 꿈을 꾸겠는가.
마침 일요일에 우리 중 대원 전체가 목욕탕을 찾은 적이 있었다. 모두 한결 같이 양말과 벗어놓은 팬티를 들고 갔었다. 마침 목욕탕 주인은 중대장(아마 경사)과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거래라고 해봐야 비누가 많이 필요할 거란 것과 샴푸는 엄청난 양이 소모가 될 것이다 는 벗은 몸으로 어떻게 고참들의 얼굴을 알아보겠는가 안개 속에서 자기 고참을 알아도 다른 고참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기분 나쁘다며 말다툼이 있을 뻔했지만 그런 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번은 호신대 학생들이 미문화원 앞길로 행진한 적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중대는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우리를 지나 학교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우리의 앞에 오자 누군가 '저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얼마나 수고가 많습니까 기도합시다.' 라고 말하고 모두는 머리를 숙이고 경건하게 기도를 했다. 난 역시 믿는 사람이라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고 신학대를 진학하고 싶었다.

[굴(석화)]
출장소는 옆을 쓰레기장이 있었고 그 옆으로 푸른 바다였다. 바다의 바위 위론 따개비가 나무의 열매마냥 달려있지 않고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런데 그 런 것이 흔한 따개비로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그건 천연 '굴'이었다. 마침 출장소에 굴을 따는 호미가 있었다. 단 번에 알아본 것은 TV에서 본 기억이 있어서다. 그 호미는 흙을 파는 삽 대신 굴의 뚜껑을 따는 끝이 뾰족했다. 그 부분으로 단단한 굴을 찍어 껍질을 떼 낸다. 다시 뾰족한 부분을 사용해 굴을 꺼낸다. 그러면 끝 이런 식으로 굴을 따러 출발했다. 나의 준비물은 그 호미와 밥그릇 하나 그릇은 굴을 담기 위해서였다. 아침부터 허리를 굽혀가며 채취한 굴은 그릇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미선은 그런 날 보며 피식 웃고 말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채취한 굴은 다른 어떤 거보다도 달고 맛이 있었다. 양은 적었지만 오늘 날 시장에서 엄마가 사다준 양식 굴은 덩치는 내가 캤던 것보다 컸지만 맛은 별로 없었다. 직접 채취해서 맛을 본 굴맛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낭만적인 생활은 계속 할 순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간섭이었겠지만 본서에서 오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발령을 한다는 거였다. 오전대는 아직 고참이 많았다. 내가 받은 곳은 '유치장' 이었다. 유치장은 의경들이 관할 하지만 대원이 급하단다. 어쨋든 오전대는 아니니 다행이었다. 유치장에서의 하는 일은 물론 유치인(교도소 가기 전이나 고소로 들어온 사람들 그들은 합의만 하면 자유의 몸이 된다.)을 관리하는 것이지만 때론 지청(검찰청)으로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을 해야했다. 검찰청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 난 지청에서 있다가 판결을 짓는 법원에도 갔었었다. 하지만 예전 TV에서 봤던 검사와 변호사와의 팽팽한 언변을 기대했었으나 실망에 실망만 했다. 한번은 해남에서 조폭으로 '십계파'가 있었는데 그들은 내가 형사계에 있을 때에도 알았었다. 그런데 그들의 변호사가 하는 말이 대견이었다. "피고인 누구는 피해자 누구를 아나요? 그때 한 짓을 지금은 후회하고 있죠? 뉘우치고 있죠! 이상으로 질문은 없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은 '피고 그때는 어디 있었죠 만약 그때 피고가 없었다면 그때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이상으로 질문은 없습니다.' 이런 장면을 상상했었는데. 하지만 변호사도 해남에선 귀한 존재였기에 그들도 돈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였다. 그런 재판이 끝이 나면 다시 경찰서로 다시 데려와야 했다. 다시 유치장으로 넣고는 인원 점검을 수시로 했다. 군대로 말하면 점호와 비슷했다. 나나 다른 의경이 점호를 시작하면 입구에 있는 방에서부터 번호에 들어간다. 그러나 방에 있는 사람이 기껏해야 두어 명 번호는 다음 방으로 연결되었고 다른 방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번호를 외고 한 방에서 하나 둘 셋···이런 식으로 외치면 마지막 인원이 '다음'이라고 외치면 다음 방으로 연결이 된다. 내가 유치장에 있을 때에는 조폭이 들어왔기에 내가 인원 점검을 시작할 즈음 그들도 서로에게 인사를 한다. '형님 일어나셨습니까!' 나 '형∼님' 이 한마디면 끝을 내곤 했었다. 유치장엔 감시카메라가 움직였는데 말이 감시카메라였지 그 카메라를 통해 유치인을 감시하는 건 드물었다. 어떤 땐 지독히 말을 듣지 않는 유치인이 있었다. 의경들도 나 몰라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난 비록 유치장에서 있긴 하지만 난 전경이다. 내가 유치장으로 갈 때에 고참이 말했었다. '유치장엔 의경이 있지만 넌 전경이다 너무 그들의 권한에 붙잡히지 말아라' 그때 왜 그런 말이 생각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난 그 유치인을 끌어냈다. 그리곤 독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곤 일체 음식을 금지시켰다. 그가 날 뛰었지만 난 모른 척 했다. 음식을 일체 금하면 지가 어쩔텐가!
이 일은 '수사과'에서의 일이었다. 수사과는 언제나 시끄러운 곳이었다. 술을 물 마시듯 해서 거리의 부량아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을 수사과의 임시 방(일종의 감옥)에서 재운다. 술 먹은 사람의 대부분은 횡설수설 하다가 술이 깨면 맨 정신으로 돌아온다. 난 이런 모습을 자주 봤었기에 술이 웬수라는 말을 믿게 되었다. 가끔 술을 먹고 행패를 공중전화를 부숴버리거나 죄 없는 여자를 괴롭히거나 패싸움을 한다던가 가지각색이었다. 거기 있으면 거반 도사가 된다. 척하고 보면 알게되니··· 도가 터진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한번은 배임죄로 들어온 중년의 남자가 있었는데 난 아직도 배임이란 죄가 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며 국어사전을 통해 알아 봤더니 절친한 이에게서 등을 쳐먹는 나쁜 죄란다. 다시 글로 돌아가 그는 해남바닥에서 소위 힘이 있는 그런 부류에 속했던 사람 같았다. 그가 잡혀오자 수사과 직원 중 몇은 인사를 했다. 똑똑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에 내가 모르는 시사계 단어가 있으면 곧잘 묻곤 했고 배웠었다. 여기 유치장에서 반년을 보내고 또 발령을 받았다. 내가 해남에 있을 때 해남읍 교회를 다녔었다. 그건 섬을 떠날 때 목사님으로부터 그 교회로 가라고 해서였다. 난 거기서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가 대예배에서 대표기도를 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난 기도는 미루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제성형제 기도해보지 않겠어요?' 라고 물을 때 난 무조건 응했다. 내가 특별히 기도를 잘 해서가 아니었다. 뭔 잘못도 없는데 난 더듬거리면서 기도를 했다. 준비를 했으면 잘 했겠지만 즉석에서 준비도 없이 한 기도였다.
난 청년부 모임에도 갔었는데 그 모임회원 중 한 명이 기독서점의 집사였다. 난 집사를 통해 여러 권 여러 종류의 책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음악에도 미쳤었는데 그것도 클레식! 난 모차르트나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등의 음반이나 카세트 테이프를 구입해서 듣곤 했다. 하도 들어서 외울 정도로. 그 카세트 테이프는 내가 제대해서 사촌누나가 임신을 했다기에 태교에 쓰라고 줬다. 다시 돌려 받지는 못했다.
난 다시 황산 지서로 발령 받았다. 지서 사환으로 있는 여자 아이(나이로 따져보면 아이가 아니라 아가씨)가 참 예쁘게 생겼었다. 지서에서 빠른 순찰함을 점검하기 위해선 오토바이를 배워야 했다. 난 오토바이를 가까운 공터에서 강 순경한테서 배웠는데 그걸 배우고서 음주단속을 할 때 오토바이를 타고서 여고 앞으로 갔었다. 여고 앞 도로는 해남 읍에서 진도로 가는 도로였고 정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난 여기서 교통단속을 했는데 내가 주로 한 것은 앞지르기 단속이었다. 구부정한 도로에서 곧은 도로가 나오니 곧바로 앞차를 앞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럴 경우엔 여지없이 나에게 걸렸다. 하지만 범칙금은 만 원 이었지만 난 '안전띠 미착용'으로 오천 원에 끊었었다. 그런 것이 하나의 배려라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자긴 앞지르기를 하지 않았다고 마구 우길 때엔 기필코 거기에 맞는 딱지를 떼었다.
강 순경에 의해 순찰 코스를 배우게 되었는데 내 코스는 황산 면을 한바퀴 도는 것이었는데 병원(의원)앞에, 어두운 뒷골목 중앙에, 교회 앞에 난 여기서도 못 말리는 남자였다. 의원의 간호사와 사귀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번의 스킨쉽에 실패를 했었다. 그러나 난 그들에게 재미있는 작은 사건들을 만들어 주었었다. 예를 든다면 그들의 방은 병원의 다락에 있었는데 그들 세 명과 밤을 보내면서 얼마나 웃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웃었었다고 생각한다. 그때도 순진했으니까.
순진했다고? 그건 아니 멍청했던 거였어! ! !
제대를 코앞에 두고 선 몸을 사려야 한다는 고참들의 말을 기억하며 황산에서의 생활도 조심했다. 한 번은 죽을 뻔한 적이 있다. 내가 차량을 눈이 빠질 정도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물론 푸른색의 교통경찰 복을 입고서 말이다. 예전 택시 운전사에게서 푸른색만 보면 저절로 브레이크를 밟게 된다고 했었다 그러나 날 완전히 무시한 듯 앞지르기는 물론 과속까지 난 황산 면에서 나오는 길목에 있었는데 그 트럭이 내 앞을 횡하니 지나치는 것이었다. 난 서라고 손짓을 했지만 트럭은 속도를 더 붙여 진도방향으로 계속 갈 뿐이었다. 난 오토바이로 트럭을 쫒기 시작했다. 나의 오토바이의 속도를 가리키는 계기판의 바늘이 구십을 넘어섰다. 더구나 굽은 도로의 시발점을 오토바이로 빠른 속도로 가니 오토바이는 원심력에 의해 서서히 바깥으로 바퀴가 나가려는 것이었다. 핸들을 아무리 도로 안으로 꺽었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순간 죽음의 공포가 내게로 밀려왔다. 난 오토바이를 세우려 했다. 저 만치서 트럭은 유유히 가고 있었다. 난 옆구리에 있는 무전기를 빼내 본 서로 무전을 올렸다. '여긴 황산 상황실 나오세요.' 두어 번 반복했으나 내가 가진 워키토키가 문제인지 상황실에서 받지 않는 건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난 문내 지서에 연락해 트럭을 잡고 싶었다. 그 차는 해남 읍을 거쳤을 거고 진도를 향해 가기 위해 여기 황산을 지나쳐야 했을 것이다 만 나는 포기했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고 자위해 가며 퍽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산 불]
해남은 내가 살고 있는 대구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었다. 그 만치 산불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근데 딱 한 번 발생했다. 그때 난 오전대에 있었는데 오전대에 비상이 걸렸다. 목표는 계곡 면에 위치한 산. 그곳으로 출동했다. 붉고 뜨거운 화염이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작전은 필요 없었다 오로지 산불을 진압하는 것. 난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오른 손엔 소나무 가지를 붙들고서. 무작정 높이 올랐다. 산은 그렇게 높아 숲이 우거지고 계곡이 있는 그런 산이 아니라 조그만 야트마한 산이었다. 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니 곳곳에 작은 불이었다. 얼마나 내가 가진 나무로 두들겨 팼던지 자신이 조금 생겼다. 그래서 다른 대원들이 여기저기 불을 끄느라 설쳐대고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크게 보면 별 것이 아닌지 몰라도 나로선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기에 한 마디로 난리였다. 우리는 군 청 직원들과 같이 진화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저 밑엔 소방서가 왔었지만 소방수의 호수가 산으로 올라오기 만무했고 또 밑에선 주민들이 양동이에 물을 길러 퍼다 나르곤 했다. 그러나 산 밑 도로 건너엔 불길이 전혀 닿지 않고 있었는지 농부는 제 할 일에만 바빠 보였다. 순간 얼마나 분통이 터지던지 그리고 곧 헬리콥터가 진화작업을 도우기 시작했다. 헬리콥터가 쏟아 붓는 물을 내가 그 물을 한 번 맞아봤다. 순전히 내가 불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 기분이었다. 헬리콥터는 가까운 물웅덩이나 연못에서 물을 담아와 산에다 쏟아 붓곤 했다. 불을 끄고서 서로 돌아왔을 땐 얼굴에 거무스럼했고 깡통만 들고 있으면 완전히 거지였다. 우리 모두 불조심을 합시다. 이상 우리 산 살리기 본부^_^

[ 이젠 집으로 ]
나의 마지막 근무처는 황산 지서였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본 서에선 구내식당의 지하수가 제 맛이었다. 사시사철 변함이 없는 물맛이라니 난 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황산에선 우리 지서 앞 예전 막걸리 주조공장이 있었는데 지하수라곤 그 양조공장 뿐이었다. 하지만 양조공장에선 확실히 땅 속에서 끌어올린 물이라는 것을 꼭 표시를 냈다. 물을 물통에 받는데 물을 마시다 보면 바닥엔 모래가 늘 있었다. 그러다 본 서에서 오라는 소식을 받았다. 이유는 제대 말년의 대원이라 본 서에 있으라는 뜻이었다. 난 더블백을 챙겨서 서로 향했다. 난 오전대에선 늘 내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사실 졸병들이 문 수경(병장)님 자리라고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나에게 뭐라 간섭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동기는 오전대에 오지 않았다. 동기는 검문소에 있었는데 내가 바람 난 사람처럼 겉(섬, 오전대가 아닌 지서나 형사계 등등)을 돌았기 때문이었고 그 동안 동기는 검문소에서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오전대로 돌아왔지만 나의 취침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차지했지만 내 자리는 내무반장 실이었다. 내무반장 실에는 쇠로 된 케비넷이 있었는데 거긴 M16소총과 유발수가 쓰는 총도 있었지만 그 총의 실탄은 남자의 성기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런 총들이 내 옆에서 날 지키고 있었다. 내가 비록 고참이었지만 정문 근무는 했었다. 그런 것이 졸병들에게 하나의 위안거리가 되겠다는 심정으로.
전경들 월급은 대단하다. 전방에서 국방부 시계가 빨리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병들의 월급은 천 단위일거라 생각하지만 전경의 월급은 차원이 다르다. 아무래도 국방부가 아니라 내무부여서 그런지 몰라도 전경의 월급은 만 단위이다. 언제부턴가 돈을 저축을 하기 시작했다. 밥이야 식당에서 나오지 간식거리는 여태껏 내 돈으로 사먹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흡족한 생활을 했으니 더구나 군인이 돈 쓸데가 어디 있겠는가 이래저래 생각한 끝에 저축을 하기로 한 것이다. 동기와 같이 했는데 제대말년에 난 그 돈으로 어불도 소망교회의 나무십자가를 시내에선 붉은 네온싸인으로 십자가가 만들어 있지 않느냔 말이다. 섬에 있을 때에도 생각했었던 것을 실천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난 공사현장에 가보질 못했다. 전화로 목사님께 인부가 갈 겁니다 아는 사람이니까 상세히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라고 말했다. 네온싸인이 설치된 날은 잔치분위기였다고 들었다. 그리고 미선이가 사진으로 십자가를 찍어 내게 편지로 보내주었다. 얼마나 기쁘던지! ! !
제대하기 얼마 전에 말년휴가를 다녀왔다. 말이 휴가였지만 실제로는 체력장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엄마에게 내가 대학교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사전 체력장 시험을 본다고 말했었다. 예전 고등학교로 갔었다. 선생님들은 다들 안녕하셨다. 고등학교 마지막 담임선생님을 만나 지금은 군에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내가 기특하단다. 기분이 좋았다.
해남으로 돌아왔을 땐 완전히 제대분위기였다. 동기와 나는 내일 있을 전역에 앞서 해남에서의 회포를 술로 풀었다. 엄청 마셨으나 돈 한 푼 들지 않았다. 그간에 알고 지냈던 인맥으로 모두 공짜였다. 동기의 해남에서의 인맥이 크게 작용했다. 우린 대흥사에서 마셨고 읍에서도 마셨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난 물에 강한 편이었다. 난 물에 강했고 동기는 체력에 강했다. 경비과에서 전역 신고를 해야했다. '병장 문제환 동 라문수는 일천 구백 ??년에 전역 을 명 받았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우린 검문소로 향했다. 동기가 지난 몇 년을 거기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터미널을 통해, 광주로 향하는 고속버스를 통해 버스의 차창을 통해 난 미련을 벗어버리고 대구로 동기는 울산으로 향했다. 우린 자주 연락할 것을 나누었지만 아직 연락을 오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곧 밝혀질 것이다.

[ 난 자유다 ]
난 제대를 했지만 완전한 자유를 느껴보지 못했다. 난 바로 학원에 등록했기 때문이다. 그땐 제대할 때 받은 돈으로 어불도 교회에 십자가에 불을 달아드렸고 남아 있는 돈도 조금 있었다. 난 그 돈으로 책을 샀고 원서를 사는데 썼다. 내가 제대할 때 내 더블백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은 대 부분 책이었고 클레식 테이프도 있었고 목사님의 설교테이프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유치장에서 근무했을 때 수갑을 챙겼는데 수갑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수갑의 행방은 묘하다. 엄마가 그러는데 무서워서 하수도에 버렸단다.
난 곧 대학을 가야했기 때문에 학원엔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학원에선 도둑 강의를 해야 했지만 난 강의를 듣는 것보단 기초적인 문제를 풀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난 악착같이 공부를 했으며 주로 영어에 목숨을 걸었었다. 그렇다고 영어를 능숙능란하게 잘 하진 못한다. 내가 중학생 일 때 그래도 영어엔 자신이 있었었다. 그때를 추억하며 영어에 자신을 붙였었는데 학원생활을 하다보니 대학 입시문제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고 문제집을 외우고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원에선 내 나이는 다른 애들보단 많았기 때문에 다들 날 보고 '형'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수능이라고 내가 대학입시와는 차이가 있지만 요즘 아이들은 정말 대단하다.

대신대로 향했다. 대신대는 경산에 위치해 있었다. 추운 겨울 날씨를 헤치고 모인 사람은 숫자가 적지 않았었다. 난 경산 역으로 갔었는데 대구신학대학교에서 시험을 치를 사람들이었다. 모두 이번에 시험을 치를 사람들이었다. 대신대에서 제공된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는 경산 시내에서 청도 방향으로 차로 약 오분 거리에 있었다. 당시 건축 붐이 일고 있던 때라 학교의 뒷산 너머엔 아파트 가 신축되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정문을 지나 확 트인 운동장에 내려놓았다. 우린 학교 5층에 위치한 대강당으로 갔다. 그때도 난 친구를 데려갔었는데 그때 그 친구는 믿음이 없었던 때였다. 모여있는 우리를 향해 어떤 분(아마 교수)이 '여기 오신 분 중에 피아노를 하실 줄 아는 분이 있으면 피아노를 부탁합니다.' 그러자 한 자매가 나갔고 우린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이란 찬송을 불렀다. 그 노래가 얼마나 은혜가 되던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그때 그 분위기가 날 압도했었다. 아니 모인 우리 전체에게 똑같이 느꼈다.
그래 난 신학을 전공할거야 날 부르셨으니 책임도 져 주시겠지 라고 생각한 나는 자신이 있었다. 입학시험을 쳤다. 신학교 시험은 일반 대학교와 다르다. 특이한 부분이 있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난 학교를 나와 버스에서 봐둔 약수터로 향했다. 물은 히뿌연 했지만 물 맛은 따뜻했다. 면접이 있었다. 교수님이 무슨 배짱으로 대구에서 이곳 경산까지 매일 다닐 수 있느냐고 묻기에 여기서 외갓집이 가깝다고 말했다. 세례는 받았냐고 말하자 군에서 받았다고 했다. 군 어디냐고 묻자 전라도 해남이라고 말했다. 시험과 면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땐 복현동이라고 대구에선 좀 후진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서 작은 하지만 지금은 큰 교회가 있었다. 막 신학교를 다니려고 했던 사람이라 대구 기독서점에 광고에서 '경배와 찬양'팀이 대구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었다. 장소는 '성서 계명대'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 성서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기에 친구를 꼬시기 시작했다. 같이 가자고 결국 친구와 같이 성서 계명대학교로 향했다. 성서 계대 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이고 있었다. 무대에선 전자기타와 드럼이 있었고 리드보컬로 보이는 형제와 자매가 있었다. 벌써부터 경쾌한 찬송노래가 거대하고 사방에 위치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찬송가는 아니었지만 그땐 복음송의 개념을 잘 모르고 있던 터였었다. 그러나 모두 예수님을 찬양하는 노래였기에 믿는 자로서 쉽게 섞일 수 있었다. 어떤 자매가 스탠드 석을 배회하며 뭔가를 나눠주었는데 나도 받았었다. 받은 카다로그 같은 것엔 '경배와 찬양'의 소개 글이 있었고 그 날 불리워 질 노래의 가사도 적혀있었다. 하지만 그런 종이가 없었어도 거기 모인 모두는 곧 잘 따라 불렀었다. 하늘엔 성령님께서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거기 모인 수 백 명의 형제 자매는 그것을 충분히 느끼고도 남음이 있었다. 곧 여기저기서 회개의 눈물을 마구 토해내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얼마나 고맙고 기쁘던지 나의 지난날의 죄가 선명하게 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고개를 들 수 가없었다. 너무 창피해서 그런 죄 많은 날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아! 그때의 기분을 그때의 마음을 글로도 말로도 표현하지 못하겠으니 속된 말로 미치고 팔딱 뛰겠다.
대신대 발표가 있던 날 난 추위를 안고서 경산으로 갔다. 내 이름 석자는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난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난 비관해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떨어졌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난 대학교엘 가고 싶었기 때문에 전문대라도 가야했다. 그러다 구역예배가 집에서 있었다. 엄마는 내가 대신대에 시험을 쳤고 떨어졌다고 말하자 장로님이 시험을 치기 전에 목사님께 말씀드렸으면 떨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고 내가 전라도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에 떨어졌을 거라고 나에게 들려줬다. 아직 지역감정이 계속 되던 시기라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허탈했다.

[ 도전은 계속되고 ]
명색이 교수라는 사람이 지역감정에 흔들리고 있다니 그렇게 구 시대적 사고를 가진 학교였다면 차라리 불 합격이 된 것이 내겐 더 잘된 일인지 모른다.
난 친구에게 말했다. '야, 대구에서 전문대 카트라인이 제일 쎈데가 어디야?'고 물었다. 친구는 날 걱정하며 영남전문대라고 말했고 나의 목표는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입시한파'란 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난 오들오들 떨고 입김으로 손을 녹여가며 시험을 쳤고 면접도 봤다. 난 공부를 하고 싶고 대학을 가고 싶고 마침 고등학교 때 건축을 전공했으니 건축과로 지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결론은 좋게 나왔다. 합격이었다.
학교생활은 재미가 있었다. 군대를 갔다 왔다는 것을 예비역이라고 부르지만 그땐 생소했다.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만났다. 우린 화장실에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아뿔사 고등학교를 3년 동안 같이 보낸 절실한 친구였다. 난 나이가 차서 군대를 가버렸지만 친구는 독자라는 이유로 면제를 받았다고 했다. 억수로 운이 좋은 놈이었다. 우린 금방 친했다. 우린 3년을 같이 보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불알친구 같은 것을 느꼈었다. 우린 거의 모든 것을 함께 했는데 난 주로 과 분위기를 잡아주는 역할을 했고 친구는 설계 수업에 완전히 친구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다. 2학년 선배로부터 알게 모르게 간섭을 받았는데 그 중 '과별 체육대회'가 그것이었다. 체육대회는 3일간 계속 되었는데 난 그것을 기회로 성남으로 향했다. 옛날 고참의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서. 편지는 제대를 하고서도 계속 이어졌으나 얼굴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난 무턱대고 성남으로 향했다. 주소를 알면 옛날 형사계에 있었던 것을 기회로 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 건 간단했다. 먼저 예상되는 지역에 간다. 그리고 부동산 건물로 들어간다. 부동산에는 보통 지도가 있기 마련 그녀의 주소와 맞는 것만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예감이나 직감을 쓸 필요도 없이 전화를 했더니 모란 시장 앞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모란'? 이 단어가 이북을 연상케 했었다. 난 양복을 입고 갔다. 찾기 쉬워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그때가 5월 중순 한참 더울 때였다. 거리 곳곳엔 여자들의 짧은 치마가 춤을 추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완전히 고참을 닮았어도 그렇게 닮을 수 있겠는가. 먼저 근육질의 덩치의 옛 고참처럼 그녀도 만만치 않았었다. 우린 거의 동시에 서로를 알아봤다. 무더운 날씬데도 양복을 입은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고 덩치 큰 여자도 그녀 하나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고 우린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손을 마주 잡고서 그녀의 집을 향해 걸었다.
걸으면서 나의 못된 손은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반 지하 방이었다. 그녀는 자취를 하고 있었던 터라 주인집 주인 눈치를 살피게 되었는데 그녀는 전도사였던 터라 그 집 주인도 그런 그녀의 생활을 알고 있었다. 난 그녀의 방에서 그녀를 있는 힘껏 안았다. 속된 말로 갈빗뼈가 부러지도록. 그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생각하면 한 쪽 가슴이 아려온다. 우린 긴 얘기를 나누었는데 주로 편지에 있었던 내용이었고 그녀의 오빠이자 내 군대 고참의 얘기도 말했었다. 그 날은 뜨겁게 밤을 보내었다. 내가 대구로 고속버스로 내려갈 때 그녀는 내게 돈 만원을 쥐어줬다. 내려갈 때 여비에 쓰라고. 고마운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대학생이 돈이 어디 있겠느냐는 뜻이었겠지만 난 다음에도 또 갔었다. 그리고 그 땐 내가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내가 쓰고 다녔다.
다시 학교에서 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었다. 다시 공부하고 난 대단한 '학구파' 였고 자칭 건축학도로서 '건축기사' 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나이도 있고 그랬으니 그땐 같은 학년에도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으니···
난 '부끄럼'이고 '창피함'이란 없었다. 난 고시원에서 공부했었는데 그런 것 또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렇게 공부해서 인지 1차 이론에 합격을 했고 2차 실기는 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거기서도 난 열심을 내었는데 오전엔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오후엔 학원에서 설계 연습을 했다. 이2차 시험은 나의 옛 고등학교에서 이뤄졌다. 선생님 두 분이 감독을 하셨는데 시험은 조금 어려웠다. 하지만 건축학도라면 누구나 해결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단 문제는 시간 안에 하라는 것이었다. 같이 문제를 푸는 사람 중에 고등학교 후배도 있었는데 M 선생님은 평소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민 선생님이 시험 중 감독이란 구실로 시험을 치르는 자들을 살폈었다. 그러다 실습실(고등학교 제도실)에서 큰 목소리가 울렸다.
'야 인석아, 넌 삼 년 동안에도 농땡이 치더라니 그런 것도 못하냐' 큰 목소리에 시험을 치르는 모두가 그곳을 보게 되었다. 난 제 시간 안에 완성된 도면을 제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조금 늦은 시간에 제출을 하였으나 선생님은 내까지는 시간 체크를 하지 않으셨다. 내 뒤부터는 시간 체크를 하셨지만 이 얼마나 고마운가! ! !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공단(건축기사 원서를 내던 곳)에 갔다. 기사시험의 합격 여부를 알고자 였다. 건물 바깥의 한 쪽 벽을 합격자 명단으로 붙어져 있었다. 모두들 자신의 이름을 확인 하고자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들의 시선과 같이 했다. 내 얼마나 이를 위해 기도했던가 그런데 내 이름과 수험번호가 있는 것이었다. 야호! 합격이다! 난 시험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합격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가 잘 돼서라고 생각했다.
마침 날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여기 공단에서 건축기사 합격자를 보여준다는 말을 어디에서 들었을 것이다. 그는 다짜고자 부드러운 말로 날 유혹했다. 그 자격증을 빌려달라고 흔히 자격증을 빌려가는 경우가 있었기에 난 돈 5백 만원을 요구했다. 그는 요즘 시세로는 1급은 오백정도 하나 2급은 삼3백 정도로 하는 것이 건축업계의 일반이란다. 나는 일시불로 돈을 요구했으나 달마다 통장으로 돈을 넣겠다고 했고 난 그렇게 합의를 했다. 우체국 통장의 번호를 적어줬으며 난 우체국 현금카드로 수시로 확인했다. 그 즈음 성남의 그녀에게서 편지가 왔다. 곧 졸업을 하니 와서 축복해 달라는 것이었다. 난 올라갔다 성남으로. 졸업식 전날에 갔었고 그의 친구들이 있어 난 혼자서 밤을 보내야 했다. 다음 날 그녀는 넉넉한 몸에 꽉 조이는 거들을 입었다. 거들을 속에 입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별 표시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난 그녀를 안았으며 예쁘다고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너무 예뻤다.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 그녀는 너무 예뻤어 ∼

그 무렵 복현동 S교회에서 난 나이 탓도 있고 군대를 제대했다는 이유로, 목사님의 딸이 놔와 동년배라는 이유로 선배대접을 받고야 말았었다. 어느 여름날에 교회청년 대학부에서 소풍을 떠난 적이 있었다. 장소는 경주. 후배(다들 후배였다.) 자매(교회에선 여자를 자매 남자를 형제라고 부른다.)중에 예쁘고 깜찍한 아이가 있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은숙' 이라고 쓰겠다. 은숙이는 예쁜 탓에 어느 장소에서나 남자들에게 주목받는 시선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은숙이도 그런걸 느끼고 있었는지 괜히 뻐기기를 잘했다. 전체적으로 포크 댄스를 추었었는데 그 아이와 내가 파트너가 되었다.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고 엉덩이를 마구 흔들고 그런 것이 우습다며 또 웃고 그 해 여름 교회 수련회가 있었다. 장기자랑을 할 때 난 여자치마를 입고 그때 유행하는 '세상을 요지경' 이란 노래를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의 절반은 배꼽을 쥐며 넘어갔다. 프로그램 중에 '예수님의 고난' 이라는 프로가 있었는데 그 프로를 내가 맡았었다. 난 산 속 으슥한 무덤으로 장소를 잡았다. 저마다 힘겹게 내가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그럼 난 그 팀에게 혹독한 벌을 주었다. 혹독하다고 썼지만 누구나 재미 삼아 해 볼만 것이었다. 예를 든다면 쪼그렸다가 일어나기나 쪼그려 뛰기 등 군에 있을 때 누구나 하는 것들이었다. 사실 예수님이 겪은 고통은 이보다 더했을 것이었다. 아이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참 열성적으로 나의 명령에 잘 따라주었다. 난 재미로 했는데 아이들에겐 은혜가 되었나 보였다. 산을 내려오기 직전 마지막 팀에게 가혹한 벌을 주었을 때 난 보았었다. 그 팀엔 장로님의 딸이 있었고 노래를 너무나 잘하는 아이도 있었다. 내가 아이라고 표현하지만 모두 이십대의 아가씨들이었다. 모두 후배였기 때문에 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한번은 청도로 향한 적이 있었다. 이번엔 놀러가기 위해서 장소를 찾다보니 청도로 찍혔었다. 우리를 인솔한 사람은 전도사님 이셨다. 출발할 때, 라면 몇 개를 가지고 갔었는데 전도사님의 코펠에 흐르는 시냇물을 펄펄 끓여서 라면을 먹는데 우리 주변엔 졸졸졸 소리내며 흐르는 물뿐이었으며 간혹 저 먼 도로에서 사람을 가득 태운 버스가 지나갈 뿐이었다. 그때엔 예쁜 동생과 함께 했었는데 그 날 무척 바람이 심하게 불었지만 바람도 기분이 상쾌한 우리를 어쩌지 못했었다. 이렇게 교회에 개해선 추억이 좋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 아 아름다운 추억이여 ]
난 그녀가 다니던 총신대학교에 갔었다. 내가 그렇게 다니고 싶어하던 학교 그 학교에 애인愛人의 졸업을 축하해 주러 오다니 졸업생들은 지하에 있는 강당으로 갔었고 난 그녀의 교실에 남았다. 교실에는 CCTV로 방영되고 있었지만 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먼저 교실의 전체적인 모습을 머리에 입력시켰다.
졸업식이 끝나고 나는 그녀를 따라 학교에서 아래에 위치한 시장으로 갔다. 한 식당에 들어갔고 부대찌게를 먹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큰 극장으로 갔다. 극장은 지하철과 통했는데 그녀는 가는 도중 화장실로 갔었는데 그녀의 친구들과 동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속옷으로 입은 거들 때문이었으리라 바보같이.
영화는 홍콩 영화였는데 성룡이 주연이었다. 그가 출연하는 작품이 다 그렇듯이 너무 웃겨 배꼽이 빠지는 것 같았다. 성남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 난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녀의 넉넉함도, 그녀의 생각도 나의 첫사랑은 전라도 여자였다. 그때 내 가슴에 안은 여자도 전라도 여자였다. 전북 정읍! 첫사랑은 광주. 내가 대구로 내려오면서부터 그녀와는 연락이 뜸하게 되었는데 대구에서도 난 외롭지 않았었다. 그건 대구에도 여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교회 후배였는데 그 애 역시 넉넉한 편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난 나쁜 놈이라는 것이다. 그 애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시내에 있는 섬유회관이 그 애의 직장이었다. 그 애와 데이트를 할라치면 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곤 했었는데 영화를 보노라면 나의 엉큼한 손이 그 애의 가슴을 만지곤 했다. 그리고 극장에서 나오면 주로 경북대로 향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집이 그 근처이기 때문이었다. 대학교에서도 우린 관계를 가지곤 했었는데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내가 요구를 했다. 학교 건물 앞 교단(?)에서, 건물 뒤에서, 벤치에서, 벽을 의지하고서 말이다. 자세도 가지각색이었는데 바른 자세에서 때론 뒤에서 어떨 땐 앉은 자세에서 젖무덤을 애무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불두덩도 애무했는 것 같다.

[ 앗 큰일 ]
난 교수님이 추천해 주셔서 설계 사무소로 취직을 했었는데 거기서 무척 바빴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여자와는 소식이 자연스레 없었다. 난 부지런히 일했기 때문이었고 명색이 건축일이란 것이 건축회관에서 신고는 기본 업무였으며 주 하는 것은 구청이나 지청 때론 법원까지 가서 구비서류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내가 장담하건데 사무실은 내가 있어서 운영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무척 바빠 야근도 했었는데 야근이 있던 날에는 다음 날엔 사우나를 하거나 선짓국을 먹곤 했다. 난 설계 사무실에 있었지만 나는 악필이라는 이유로 연습을 많이 했다. 그리고 청사진을 직접 굽기도 했었는데 '트레싱지'라는 투명한 종이에 그림을 그림(설계도면)을 그리고 빛을 이용한 청사진을 구우면 그것으로 완성된 도면이 나온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나의 마지막 일이 될 줄은 그땐 모르고 있었다.
첫 휴가가 주어졌다. 휴가비와 함께. 난 돈을 보면 무슨 귀신이 붙었는지 돈을 무척 아끼는 편이다. 그 돈으로 난 오토바이를 구입했다. 옛 군대를 추억하며. 하지만 이것이 잘못이었다. 바쁜 업무를 위해서라면 자전거가 제격이었지만 그땐 폼 나는 오토바이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난 오토바이로 교회 후배를 집에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팔공산으로 향했다.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은 기억이 없다. (여기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쓴다.)난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내가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앞에 큰 트럭 같은 것이 불법회전을 하고 있었다. 난 옛 날을 생각하며 속도를 줄이려고 했으나 이미 속도가 붙은 후라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난 트럭과 부딪힘과 동시에 몸이 공중으로 '부웅' 날았다. 난 팔이 부러졌으며 다리도 말짱할 리가 없었다. 이것이 지금의 나의 몸이다. 지금 어렵풋이 기억이 나는 것 주에 하나는 병원에서 엄마를 만나는 것이었다. 난 병원 복도의 긴 의자에 눕혀있었다. 나를 병원으로 데려온 사람들은 경찰이었다. 경찰은 논 두렁에 쓰러져 있는 날 보며 투덜거렸다. 더구나 오토바이 사고였기 때문에 안 그래도 건수(?)가 없던 때에 난 좋은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피해자는 정신도 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조서를 자기 맘대로 해도 탓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조서를 꾸몄다.
[장소: 팔공산 파출소 인근 사건개요: 교통사고(오토바이 심한 손상) 본 사건은 오토바이가 과속으로 진행 중 어떤 차와 접촉 피해자는 병원으로 후송되었음.]
아마 이렇게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헬멧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살았지 만약 헬멧을 착용하지 않았더라면 했다면 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헬멧을 착용했었어도 머리에 심한 손상을 입었다. 그런 가운데 난 엄마를 보고 '아빠한테는 아무 말 하지마' 라고 했다. 아버지는 강한 분이지만 마음이 여린 분이시기에 내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여기까지 쓰니 나의 마음이 아프다.

[ 작은 자로서의 삶 ]
내 입은 분명 존재했으나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했다. 눈도 귀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지도 않았고 보기는 보나 초점이 없는 눈이었고 시끄러운 소음 속에 있어서도 도인과 같은 행동을 했었을 것이다. 그저 눈을 감고 모든 것을 다 아는.
나의 부러진 팔에는 철사로 관절을 대신했고 왼쪽 다리엔 철심을 넣었다. 머리는 뇌에 물이 찼는데 뇌 사진을 찍으면 온통 파란 색이 전부였다. 머리에 물이 가득 찬 것이다. 그대로 놔두면 매우 위험하단다. 그래서 급하게 수술대에 올랐다. 다행히 병원 원장님과 같은 문 씨여서 원장님이 직접 수술에 참여했다. 원장님이 계셨기 때문에 난 특별히 주의가 요망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첫 수술에서 가래를 빼기 위해 목에다 구멍을 뚫어야 한다고 해서 부모님은 아들이 걱정이 되어 승낙하고 말았다. 난 가래를 모르고 있었었다. 그런데 수술을 .했으니 그리고 그 수술을 뒤로 난 말을 못하게 되었다. 앞에서 밝힌 그대로
수술을 할 때마다 여자도 그렇고 남자도 수술 도중 소변의 배출을 막기 위해 어렸을 적 고무줄로 새총을 만든 기억이 있다. 그런 누런 고무줄을 성기로 밀어 넣는다. 얼마나 따갑던지 난 수술을 할 때나 병실에 있을 때에도 그런 것을 몸에 찬용을 했었다. 그것을 할 때는 몹시 거북했으나 하고 나면 차라리 편했다. 그러나 그것을 뺄 때 심한 아픔이 온다. 그리고 그것을 빼서는 소변을 할 때마다 방광이 무지 아픔을 느껴야 했다.
엄마는 걱정이 배가되었다. 마침 중 환자실에서 사람이 죽어 나갔다. 중 환자실은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면회는 제한이 되었다. 그래서 엄마는 날 일반 입원실로 옮겨줄 것을 의사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나의 상태는 계속 지켜봐야 하는 형편이었기에 일반 병실 행行은 묵살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의사를 계속 쫒아 다니면서 요구를 했다. 그러다 원장 의사가 회진을 하려다가 엄마와 만나셨다. 엄마는 담당 의사에게 했던 말을 원장 의사에게 말했고 원장님은 엄마의 말대로 하라고 의사에게 지시했다.
난 침대에 누운 모습 그대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으나 나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병원에는 전도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엄마는 하나의 어쩌면?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지나가는 전도사를 불렀다. 엄마가 말했다.
'우리아가 참 착실히 교회에 다녔던 아입미데 그런데 오토바이 사고로 저기 저렇게 누워만 있고··· 나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우리 아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그럼요 이렇게 잘 생긴 사람이 교통사고라니 여러분 기도를 합시다.'
전도사님은 여자였고 여러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엄마와 전도사의 손을 잡았고 전도사는 한 쪽 팔로 마치 안수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엄마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기도로 내가 깨어나리라 믿지는 않았다. 단 혹시 기적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내가 정신이 들고 갓난아기처럼 엄마라는 말을 했을 때 엄마와 아빠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아빠는 내가 눈을 뜨고 말을 했으니 곧 걸으리라 생각했다한다. 말을 했다는 이유로 내가 있는 병실은 잔치분위기로 바뀌었다. 난 말은 했으나 어눌한 말투였고 급하게 말하면 나의 말은 듣는 상대에게 여간 곤혹을 치러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기 까지가 내가 들은 것이다. 이제부턴 사실을 쓰고자 한다.

[ 컨디션 ]
내가 퇴원을 하고 아파트 집에 있을 때였다. 복현동 골목 집에서 아파트로 이사올 때 리어카에 짐을 잔뜩 싣고서 내가 끌고 엄마가 뒤에서 밀어주고 아파트로 왔었다. 퇴원을 했다고는 하지만 차라리 병원에 있는 것이 더 편했으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퇴원한 다음 날부터 엄마가 저에게 강한 운동을 시키셨는데 엄마의 생각에 내 오른팔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엄마 생각엔 오른 팔만 고쳐놓으면 팔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며 일어섰으니 걷기가 더 쉬울 것이다 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렇게 한 것은 병원에 있을 때 다른 보호자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운동은 나를 눕혀놓고 나의 왼 팔은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선 나의 부러진 오른 팔을 팔꿈치가 움직이길 바라며 나의 오른 팔을 잡아 오므렸다 폈다 하는 식으로 반복을 했다. 여러분은 남자의 눈물을 보았는가
난 그렇게 운동을 할 때면 닭똥 같은 눈물을 마구마구 흘렀었고 비명도 집이 떠나라할 정도로 울었었다. 그렇게 내가 운동을 하면 난 눈물을 흘러야만 했고 하루종일 팔이 아파 작은 충격에도 난 무지 아픔을 느껴야 했다. 그러던 다음 날 그 날도 역시 운동을 해야했지만 그 날 만큼은 컨디션이 좋지 못했었다. 그래서 난 엄마에게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내일 합시다 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운동하지 않으려 한다고 핑계를 대고 있다며 하지 않겠다는 운동을 강제로 시키셨다. 난 발버둥을 쳤지만 그것이 오히려 해가 될 줄은 몰랐다. 그때 갑자기 내 어깨에서 '뚝'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엄마도 들었다 그렇지만 탄력이 붙어 있는지라 계속 운동을 하셨다.
운동의 시작과 끝은 엄마마음이다. 운동을 끝냈지만 난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었다.-구르진 못했고 엎어져 팔의 아픔을 호소하며 울었다.- 하지만 난 지금도 데굴데굴 구르지 못한다. 그때 다친 팔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껏 몸만 옆으로 돌리기만 할 뿐이다. 엄만 사태가 위급함을 느끼고는 전화로 고모에게 전화를 했다.
다음 날 고모가 왔지만 고모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날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으로 갈 수밖에 동네에 있는 정형외과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장애인이 병원 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어찌해서 병원에 갔었는데 의사 말이 내 어깨에 새로 뼈가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의사가 경북대 병원에 소개시켜 주었고 경대경원으로 갔다. 병원에서 진단결과 어깨뼈가 아직도 자라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수술을 못한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어깨가 자유롭지만 걷지는 못한다. 독자 분이여 컨디션(바이오리듬)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라
집에 있을 때였다. 아마 가을이었으리라. 난 엄마와 그 운동을 했고 몸이 찌뿌둥 하다는 말에 엄마는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셨다. 살다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나도 그렇게 믿고 잠을 청했습니다.
자면서 몇 번을 깨었습니다. 몸이 무거워서 입고 있던 옷이 땀에 젖어 무거웠기 때문이다. 당시 난 고모가 사준 옥매트에서 점을 자곤 했었는데 옥매트는 전기를 사용하므로 행여 땀으로 전선에 습기가 찼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엄마가 나를 보곤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땀을 많이 흘렀는지 사우나 탕에서도 이만큼 빰을 빼진 않았었다. 어쩔 수 없이 자다말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는데 자다말고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 !
그때 엄마는 얼마나 놀라셨을 까 어찌 다 갚으리오 어버이 은혜를···

[ 애완동물 ]
우리 집엔 개가 있습니다. 동생이 날 위해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이름은 '마꼬' 동생이 지었는데 꼬마란 말을 거꾸로 붙인 이름이라고 말하더군요
마꼬는 발바리 종류라고 불리길 원했던 개이었습니다만 알고 보면 '똥개'입니다. 똥개란 녀석이 얼마나 말을 잘 알아듣던지 금세 우리 집에서 사랑을 독차지하곤 했었습니다. 아직도 우리 집 앨범엔 마꼬의 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암컷이었는대요. 어느 날 새끼를 배고선 새끼를 낳더라구요. 그때 마꼬는 새끼의 태반을 먹고 새끼의 오줌과 똥도 먹고 그러더군요. 어찌나 기특하던지
새끼를 출산할 때 저희 집 모두는 그것을 지켜봤습니다. 신기하잖아요. 엄마는 마꼬에게 미역국을 끓여 줄 정도로 대단한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자 마꼬의 몸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털갈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깨끗함과 깔끔함을 신조로 아신 어머니껜 마꼬의 털이 여간 부담이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마꼬를 팔았는데요
그땐 내가 엄마에게 팔지 말라고 그간 함께 했던 정이 있지 않느냐고 엄마의 양심에 호소를 했습니다. 엄마는 그렇더라도 털이 엄청 빠지지 않니 엄마는 결국 마꼬를 팔기로 생각하셨습니다. 난 사람도 머리카락이 마구 빠질 때가 있어 라고 엄마를 설득하려 했지만 엄마는 마꼬를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 동생은 길을 걷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강아지가 불쌍해서 데리고 왔다며 죽어 가는 강아지를 데려왔습니다. 불쌍한 사람이나 동물을 그냥 모른 척 지나가지 못하는 천사 같은 마음을 소유한 동생입니다. 결국 그 강아지는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또 한번은 거북이를 데려왔습니다. 하지만 거북이를 위해서 어항 비슷한 것을 마련하기 어려운 지라 가족들의 합의 하에 물에다 풀어주기로 했습니다. 쉽게 말해 불교에서 말하는 방생인 셈입니다만 거북이는 자기가 자유란 걸 느낄 때 뒤돌아본다고 합니다. 자기를 풀어준 사람을 보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전 밀알에 갈 때 밀알의 앞에 있는 성당저수지에 놔주려 했는데 난 걷지 못하는지라 다른 장애우에게 부탁해 거북이를 풀어주었습니다. 그 거북이는 알까
동생이 보험회사에서 일을 할 때 '요크셔테리' 종류의 강아지를 데려왔는데 이름은 '까롬이' 라고 전 주인이 그렇게 불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개를 새장에 가두어 키웠다고 하더군요 그런 까롬이가 동생의 차를 타면 좋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운전을 못할 정도였습니다. 까롬이는 암컷으로 예뻤습니다. 한 흠이라면 똥 오줌을 가라지 못한다는 거였죠
까롬이는 오래 살았습니다. 인간으로 따지면 아마 중년의 아줌마라고나 할까요. 우리 집에선 강아지는 아버지의 노리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의 출퇴근시 아버지께 시달려야 했거든요. 아버지는 사랑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목만 잡고 어린 손주에게나 하듯 서울보기-아시죠? 목을 잡고 공중으로 들어올리는-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하면 뼈가 바로서는 계기가 되는 지 몰라도 개한테는 자칫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엄마와 나는 반대를 하곤 했습니다. 집이 이사를 하던 날 까롬이는 아무것도 모른 체 이사를 와 우리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 동생이 어린이 집에서 새하얀 개를 데려왔는데 그것도 암컷이었습니다. 이름이 없던 터라 내가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때는 내가 컴퓨터 학교를 다닐 때였고 컴퓨터 학교의 내 옆자리의 여자이름이 미숙이란 장애인 여자가 있었고 내 오른 쪽엔 진미란 여자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따 '미미'라고 지었습니다. 미미와 까롬이 두 마리다 우리 가족에 큰 즐거움을 주었습니다만 한참 개를 대상으로 장염이 유행하고 있을 때 두 마리다 땅속에 묻어야 했습니다. 지금 그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만 아마 엄마의 마음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계속 같이 자고 같이 먹고 했으니깐요.
난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왜 그렇게 괴롭히느냐구 다시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아주머니가 개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더구나 동생이 어린이 집의 원장이 개 알르레기가 있다며 미니핀 종류의 강아지를 데려왔습니다. 또 있습니다. 엄마는 매일 운동을 하시는데 어느 날 까만 개가 불쌍해서 데려왔습니다. 제가 보니 시츄 종이었습니다. 엄마는 그 개를 목욕부터 시키셨습니다. 목욕을 하고 나서야 그 녀석을 보았는데 동그란 눈이 어찌나 초롱초롱한지 내가 검둥이라고 불렀답니다. 검둥이는 익히 들었던 이름처럼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검둥이는 수컷입니다. 그리고 힘이 아주 세 답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걸 보면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아주머니가 데려온 개는 발바리였는데 동생이 '머루' 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머루와 검둥이가 정이 오갔나 봅니다. 검둥이는 동생이 다니는 학교의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결국 머루는 남편 없는 과부가 되어야 했죠! 불쌍한 머루 요 며칠 전엔 치와와를 교회 집사님이 주었는데 척 보니 최와와는 아니었습니다. 그 개 역시 암컷이었습니다. 머루가 요새 새끼를 낳고 추위가 몰려오자 엄마가 와와(와와는 치와와에서 치자를 빼서 지은 이름이랍니다.)를 안으로 데려오자 귀여움을 받으려고 앙달을 부립니다 어찌나 귀여운지

[ 자살 ]
내가 팔이 있으나, 다리가 있으나, 입이 있으나 아무것도 못한다. 지금 살아본들 부모님께 상처만 주지 않느냐 똥오줌을 못 가리니 침대에다 똥을 얼마나 누었던가 난 왜 그리 똥을 많이 쌓던가 난 전혀 필요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그래 차라리 죽어버리자 교통사고 때 난 죽었어야 했다. 죽었다면 날 위해 슬픔은 있겠으나 잠간일 것이요 곧 잊겠지 왜 그때 죽지 못했나 난 죽어야해 죽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나
링게르 줄이 눈에 뛰였다. 혈관에 공기가 들어가면 사람은 죽는다는데 그렇게 하자 난 링게르 줄을 잡았다. 방울 방울 떨어지는 링게르 난 잡았다가 떼었다. 링게르에 공기 방울이 들어갔다. 공기방울이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아 곧 죽는다 엄마 안녕 나 죽었다고 너무 슬퍼하지마 공기방울이 내 혈관으로 들어갈 찰나 간호사가 와서 링게르를 새로 바꾸는 것이다. 링게르액을 체인지 하는 것이다. 간호사는 미안해하며 문제성 씨 꼭 쾌차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난 간호사를 비정한 눈초리를 날렸다. 너 때문에 난 못 죽었어 나쁜 년! 난 죽어야해! 실패했다. 다음에 도전한 것은 밥을 먹지 않는 것이다. 난 배식되어 나온 밥을 먹지 않기 시작했다. 참고로 난 배고픔을 참지 못한다. 이것은 제일 빨리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퇴원을 했었어도 죽음에 대한 나의 갈망이 있었었다. 죽음을 동경한 것은 수시로 제발 했었는데 한 번은 이후에 내가 컴퓨터를 배우고 있을 때 나의 아버지가 나를 강하게 운동을 시키셨다. 난 아버지가 싫다.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싫어서 고개를 돌리기도 했었는데 한 동안 컴퓨터 학원을 간답시고 운동을 게을리 했다. 겨울철이라 나의 몸은 빠르게 굳어져 갔는데 따뜻한 공간에서 몸이 몇 분이 있어야 몸이 풀리곤 했었는데 아버지는 같이 죽자며 내게 운동을 시키셨다. 다음 날 컴퓨터 학원에 몸은 있었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죽어라는 아버지의 말만 기억이 되었었다. 그래 죽어주겠어 학원을 마치고 난 학원에서 나왔다. 집으로 가기 싫었다. 어디든 가자 어디로 가지 무작정 휠체어를 밀었다. 날씨는 따뜻했다. 학원을 나오는 데도 힘이 들었었다. 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5층 건물에서 나왔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집과 반대방향으로 휠체어를 끌었다. 집에는 가기 싫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엄마가 일찍 오셨다. 진석아, 어디로 가노? 라고 내 뒤에서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도 내가 왜 엄한 길로 가고 있었는지 짐작하고 계셨던 것이다. 내가 탄 휠체어를 손수 밀으셨다. 엄만 학원에 잠 간 가셨다. 내 가방을 챙기기 위해서 위로 올라 가셨지만 나는 또 빠져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한 나머지 인터넷을 뒤졌다. 그러다 밀알에서 동영상 자료를 찾다가 텔런트 김자옥 씨의 간증이 있었다. 김자옥 씨는 집사란다. 김 집사는 삶을 허무하게 느끼고 있었나 보였다. 그러다 언니의 자살이란 소식을 들었었고 우째우째해서 결혼을 했단다. 그러나 김 집사는 자식을 생산하지 못했었는데 어느 날 교회에서 단체로 기도원을 간다는 소식에 기기로 했었다. 그는 기도를 할 때 '나에게 자식을 주십시오' 란 말만 계속 했다고 한다. 그렇게 김 집사는 자식을 원했었다. 그러다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집은 아파트였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누군가가 자기를 안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따뜻했다. 분명 김 집사는 그걸 느꼈었고 그 후로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갔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임신이란다. 그러고 김 자옥씨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기도를 하라고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나 역시 뭔가를 원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어주신다. 난 김 자옥씨의 기도를 도전삼아 나도 같은 말만 되풀이하기로 했다. 난 걷게 해달라고
난 다시 용기를 얻어 살기로 했다.
그러나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건 엄마와 아버지이다. 엄마는 날마다 내가 눈을 뜨면 운동을 시작하신다. 이사를 와서 내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아직 부모의 눈에는 어설프지만 보행기를 탈 때 예전엔 몸이 죽어가는 사람처럼 축 늘어졌는데 이젠 보행기를 두 손으로 잡아가며 움직여보았다. 할렐루야 내가 걷는 것이다. 하지만 힘이 없는 나는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내려와야 했다. 내가 보행기에서 내릴 때면 엄마는 '겨우 고것타고 내리나' 하시고 아버지는 '태우기도 힘든데 한 삽십분 탔나 앞으로 타지마' 라고 하신다. 그러면 나는 내 나름대로의 고집이 있어 '예 이젠 안 탈게요' 그러면 혼자말로 궁시렁 거리지만 그 소린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정말 콱 죽고 싶어졌다. 엄마가 잘 쓰는 말가운데 하나가 '어휴 내가 니 궁디나 닦아줘야 하나' '다친지가 벌써 십년이 흘렀어 내가 죽을 때는 하려나' '차라리 디져라' 이 정도면 엄마나 아버지가 굉장히 화가 났을 때의 일이었지만 내가 움직이기 위해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리고 기마자세로 기어야 한다. 그러나 난 아직도 몸을 곧추세워 기지를 못한다. 사고 때 허리를 다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원에선 그렇게 다친 곳이 없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밀알 캠프에가서 한의사들이 무료로 검진하는 것이 있다. 그 검진을 받을 때 女한의사가 형제는 허리가 약합니다 병원에선 뭐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라고 내게 물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허리가 좋지 못함을 알았다. 그런 내가 허리를 곧게 세우고 기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엄마는 '텔레비전을 한번 바라 팔다리 없는 사람도 잘만 걷더라 닌, 팔다리 붙어있는 게 왜 못하노?' 난 티브를 보지 않는다. 텔레비전이 부모님이 계시는 큰방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큰방으로 가서 볼 수도 있겠지만 난 아버지가 싫어 큰방에 가지 않은지 꽤 되었다. 난 아버지가 싫다. 내게 단 한번도 좋은 말을 하신 적이 없다. 더구나 아버지는 심장이 좋지 않으신다 원인은 스트레스와 담배 때문이다. 아버지가 화가 나면 담배를 피신다. 나 때문에 아버지의 건강은 더욱 나빠지기만 하는 것이다.
아마 내가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에 부모를 공경하라 했는데 부모에게 걱정케 하지 마라 했는데 성경에서 부모에 관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의 가슴이 쓰라린다.

[ 거기 수술 ]
난 여전히 엄마에게서 밥을 받아먹었다. 어쩌랴 내가 손을 못쓰니! ! ! 난 여전히 물을 많이 마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소변양도 많았다. 보통 사람들은 나의 소변 양을 보고 깜짝 놀란다. 나의 소변 양이 많음은 평소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이런 특이한(?) 환자를 무슨 병으로 오인했다. 의사들은 나의 하루나 일주일 소변을 모으라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도 나의 소변이 왜 많은지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병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에게 티박을 주셨다. 결국 나에 대한 조치로 물을 마시지 못하게 엄중 감시를 하셨다. 그러나 흔한 것이 정수기요 물인데 그런 것들이 있는 한 나의 갈증해소를 위한 물을 마심은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병원 물리치료실에 갔었으나 나는 널따란 마루에도 앉아보질 못했다. 그땐 치질이 심했었다. 치질도 문제였지만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누워는 있겠으나 앉지를 못했다. 난 항문이 바깥으로 돌출했으며 쉽게 표현하자면 심하게 튀어 나왔었다. 그때 퇴원을 했었는데 욕창은 엄마가 병원에서 얻어온 거제와 소독약으로 매일 아침마다 치료를 해주셨다. 당시 나는 보기에도 엄청 뚱뚱해 보였는데 그것은 살이 쪘다는 것 보다 부었다는 표현이 내게 어울렸다. 그렇게 퇴원을 하고 부모님은 나에게 좋은 것은 죄가 먹이셨다. 그렇게 나의 몸은 차츰 좋아졌다. 그 즈음 동생은 차를 타고 다녔다. 자기 차가 있었다. 동생은 '보험설계사'였는데 무척이나 열성을 보였었다. 여 동생의 차로 고모네 집으로 갔다. 고모 집은 빌라로 아파트로 2층에 있었다. 예전 고모가 열쇠를 잃었다고 해서 가까이 있는 사무실로 찾아 왔었다. 그때 내가 벽을 타고 열린 창문으로 들어갔었다. 하지만 이젠 난 걷지도 욕창 때문에 업힐 수도 없었다. 고모는 기가 막혔을 것이다. 나도 답답해 미칠 지경인데 고모부가 날 업으려 했다. 그때 나의 욕창이 나의 뇌리에 아픔을 전해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난 눈이 크다. 눈 큰 사람인 눈물이 많다고 하는데 내가 운 것은 눈이 커서가 아니었고 아파서 울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요즘에도 난 잘 운다. 슬퍼서 울고 감동을 받아 울고 감명 깊어서 울고 난 감정이 풍부하다. 이렇게 변명해 본다.- 결국 난 그렇게 싫은 병원으로 가야했다. 이번 수술은 독특했다. 부분 마취였기 때문에 난 수술의 모든 과정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욕창은 낳았지만 다시 이런 수술을 또 해야했다.
내가 수술과정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부분마취였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마취는 또 있었다. 나의 왼쪽 다리에 넣어둔 철심을 빼기 위해서였다. 이것 역시 부분마취를 했기 때문에 수술의 전 과정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 병원은 정형외과 전문이었는데 내가 만약 사고를 당하고 여기에서 치료를 받았다면 지금쯤 걷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난 밀알에 다녔었는데 믿음도 조금 있었나 보였다. 더구나 병원의 이름이 '성모' 병원이었기에 하나님을 믿는 다고 생각을 했고 간호사에게 '나'라는 가스펠송의 가사를 부탁했었다.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김 간호사가 적어준 '나'의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부를 때마다 나의 마음이 따뜻함을 느꼈었고 하나님이 나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시는 거 같았다. 난 수술을 끝내고 병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날 기다리고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소식이었다. 나의 의료보험이 중지되었다고 의료보험 공단에서 사람이 왔다. 내가 오토바이를 탈 때 무슨 사건이 있었고 그때 범칙금을 내지 않아 의료보험이 취소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늘어놓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말이 맞는다면 첫 번째 P병원과 대학병원은 어떻게 해결이 되었느냔 말이다. 그런 문제가 발생하니 엄마는 불평을 하시는데 화살은 늘 나를 향했었다. '닌 오토바이는 왜 사서 이 난리고 하여튼 닌 어렸을 때도 날 그렇게 괴롭히더니 또 날 괴롭히냐'
난 너무 기가 막혀서 울면서 기도했다. 난 담배도 술도 안 하는데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느냐고 그때 김 간호사가 병실로 왔을 때 이런 말을 했다. '김 간호사, 하나님은 없어' 김 간호사는 너무 울어서 부은 눈으로 말한 나를 보고는 가버렸다. 난 퇴원을 했다. 의료보험 문제는 잘 해결이 되었다. 그래서 퇴원을 했지

난 교회에 다시 출석 할 수 있었다. 양심이 있으면 어찌 가겠는가 하지만 난 교회로 향했다. 얼마나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가 집사님들이 보고 싶었었다. 난 예배는 갔었으나 눈을 돌려야 하는 상황-대예배가 끝나고-에서 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예전에 초등학생 5,6 학년 아이들을 가리켰는데 아이들이 보였던 것이다. 날 위해 얼마나 기도해 주었는데·······마침 강도사로 계시다가 목사로 되신 분이 있었다. 지금 그 분은 영국에서 공부하신다. 그 목사님이 날 밀알을 소개시켜주셨다. 난 그 후로 밀알과 교회를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있다. 난 교통 사고로 인해 많은 걸 잃었다. 하지만 얻은 것도 잃은 것만큼 있다. 하나님을 다시 찾았으며 새로(하지만 전에도 있었는 것)사람도 많이 알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던 친구들을 잃었다. 친구들이 어떤 소식을 통해 내가 사고가 났음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전화를 했겠지 그러나 난 집에 없었고 병원에 있었다. 몇 번을 시도를 했겠으나 연결은 안 돼지 자기네들도 바쁘고 그러니 자연히 거리가 멀어지고 입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남의 나의 애인은 아파트의 집으로 찾아왔었다. 내가 그랬듯이 주소만 들고 그 여자는 날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했다고 한다. 40일 금식기도는 이2천년 전 예수님이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을 때 40일 금식생활을 하셨었다. 40일은 어쩌다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는 날이었다. 목숨을 걸고 날 위해 기도했다니 난 얼마나 축복을 받은 것인가 하지만 그땐 그런 걸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날 사랑했다고 그랬다. 나와 한 평생을 같이 보내고 싶었다고 했다.
아!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나! ! !

[ 오 주여! ]
밀알에서 사랑의 캠프에 갔었다. 목적지는 지리산! 지리산에 위치한 유스호스텔! 매일매일을 예배를 했었으며 난 힘이 없는 왼 쪽다리를 오른 쪽 다리로 누르며 움직였다. 마지막 날 예배 때 난 열심히 찬송을 불렀고 열심히 기도를 했었다. 다리는 저녁이라 차갑기 마련인데 내 다리는 그렇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에 옆을 보았다. 그리고 까무라칠 뻔했다. 예수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아니 아니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고 더구나 잠도 자지 않고 있었다. 포근한 눈빛 너그러운 눈빛 언제나 나와 함께 있겠다는 무언의 약속이 있었다. 너무나 고마워 눈물이 나왔다. 눈을 감고 확인코자 눈을 떴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간 이동이라도 했단 말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은 나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인가! ! ! 신약성서에 바울이 밤에 환상을 본 것처럼 바울은 밤에 보았기에 꿈이라고 쳐도 난 벌건 대낮에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또 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길을 통행하던 중 예수님이 사울을 만난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사울을 쓰시기 위해 예수님이 사울을 먼저 찾으셨다. '쓰시기 위해서' 그렇다면 하나님을 나를 쓰시려고 내게 왔단 말인가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오늘 문득 예수님이 날 찾은 건 날 '쓰시기 위해서' 란 생각이 든다. 할렐루야

[ 장애인 국비교육 ]
2001년 나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사각의 내방 베란다 방향으로 내 컴퓨터가 있었다. 내가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는 교회와 밀알(선교단) 이었다. 교회는 내가 사고나고 퇴원 할 당시는 S교회였으나 교회에서 장애인은 나뿐이었으며 그렇기에 교인(교회)측에서 난 신경이 쓰이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라고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난 교회를 옮겨야 했다. 장애인이 있는 교회. 장애인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아닌 보통 평범한 대상으로 대해주는 그런 교회. 그래서 지금은 서문교회에 출석한다. 2001년엔 내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전에 밀알을 출석하고 있을 때 밀알에서 나에게 대표기도를 해보겠느냐고 간사가 말을 했을 때 난 평소의 생각대로 거절하지 못했었다. 기도는 미루는 것이 아니다고 평소 생각했었기 때문에. 난 다음 주의 기도를 위해서 일주일간 기도를 했다. 그래도 준비를 해야하고 준비에는 기도가 제격이었다. 그렇게 해서 난 대표기도를 했으며 모두가 은혜를 받았다고 전해주었다. 역시 기도로 무장하면 늘 이긴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2001년 생활 정보지를 통해 국비로 장애인 컴퓨터 교육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이사를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다. 난 엄마에게 컴퓨터를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며 얘기를 했다. 엄마는 생각은 좋은데 무슨 수로 어떻게 매일을 다닐 수 있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엄마의 말이 옳은 것이지만 난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기도를 했었다. 내가 다님으로 다른 장애인에게 도전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자위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이번에 밀알을 가면 전동휠체어를 빌려달라고 말해야지 하며 밀알을 갔었다. 그러나 전동휠체어를 빌려달라고 말하지 못했었다. 그들에게도 전동휠체어는 발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아 내가 괜한 욕심을 부렸구나 주여 그러나 전 배우고 싶습니다. 주여, 주여 기도를 했었다. 밀알은 예배 시작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는데 그때 내가 부른 노래는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감사해요 주님 뜻을 믿기 때문이죠' 아 하나님의 뜻이 하지 말라는 거로구나 말은 하지 않았으나 나의 얼굴 표정은 실망, 실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계획을 허락해 주셨다. 마침 봉사자가 나를 자기 차에 태우고 집으로 가고 있을 때 내가 장애인을 대상으로 컴퓨터를 가르치는 학원이 있다고 말하자 형님 내가 도와줄게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봉사자는 방통대 컴퓨터 학과를 다니고 있었으며 교회(대구밀알)와 직업이 있는 봉사자였다. 2003년 겨울 이 오기 전에 서울로 갔지만 난 등록을 하고 다녔다.
학원은 집에서 출발하면 10십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학원에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컴퓨터 그래픽스 운용기능사 시험을 목표로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플러시와 포토샵 일러스트를 가리킨다.
난 팔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자를 대고 줄을 긋기가 쉽지는 않았다. 실제 시험장에서 과제를 내어주면 자로 줄을 긋고 치수를 재어야 합격하기 쉽다고 말했지만 난 줄을 긋는 것은 학교에서 많이 했었기 때문에 지긋했지만 실기시험보다 먼저 이론 시험에 합격을 해야만 실기를 보기 때문에 먼저 이론부터 배워야 했다. 난 이론이란 것은 무조건 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늘 나왔던 문제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대 나왔던 문제들로 공부를 했었는데 하나님은 날 이런 방법으로 허락하지 않음을 그땐 몰랐었다. 난 그런 것도 모르고 무작정 피 터지도록 공부만 했다. 그러나 시험도 자신 있게 보았다. 예상했던 문제들 이었으니까! 자신감을 갖고 교회를 갔었다.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난 어떠한 결과에 순응하는 편이다. 불합격이든 합격이든. 그래서 결과를 미리 알아보려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었다. 마음 속에선 합격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있었기에 예전 학교 다닐 때에 건축기사를 합격했을 때도 마음속에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점수를 알아보았다. 난 합격 불합격을 알아보기보다는 점수를 알아보는 편에 속하는데 점수를 알아야 합격, 불합격을 당연히 알지만 왜 점수를 먼저 알아보는 것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합격과 불합격이란 말에 내가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해야할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시험을 쳤다. 첫 번째는 같은 학원 친구들이 있었으나 두 번째는 나 혼자였다. 같은 시험을 치르는 사람이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두 번째도 시험은 쉬웠다. 내가 준비했던 예상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 있게 시험을 치렀지만 역시 결과는 좋게 나오지 않았다. 난 하나님께 기도로 물어보았다. 제가 왜 불합격을 했나요? 제가 기도를 하지 않았나요? 왜 번번이 불합격입니까? 기도로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어느 날 하나님이 내게 응답을 하셨다. 여기서 어느 날이라 함은 일 순간 이 아니고 시간이 길었었다. 하나님은 내가기도 중에, 말씀을 읽는 중에 하셨다. '제성아, 난 너의 기도를 들어주겠다. 네가 바라는 것을 들어 주겠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는 말했다. '예! 나는 문서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소설가는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만약 널 이번 문제에 합격을 했다면 다음은 무엇을 하려느냐 넌 2차는 못하지 않느냐!' 사실이었다. 그래픽스 시험은 줄을 긋는 둥 치수를 재는 둥 나의 현실적인 신체구조상 어렵다. 주님은 날 정상인으로 쓰고 싶지 않으셨다. 만약 정상인으로 쓰길 원했다면 장애인으로 만들진 않으셨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다. 옛날 날 만나주심도 감사한데 나를 선교사로 세워 주신다는 데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해야지 컴퓨터를 잘해본들 무슨 소용 있으랴
난 감사를 했다. 내가 글을 쓰면 사용하시겠다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나 지금의 난 어떤가 글을 쓰는가 아니다. 생각만 있을 뿐이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통해 일하소서

[ 그거 못하면 데져라 ]
엄마는 얼마나 속이 터질 것 같으면 그것도 못하면 뒈져라 하고 말씀하신다. 내가 운동을 못할 때 하시는 말이다. 얼마나 속이 상하시면 저럴까 싶지만 그런 말도 자주 들으니 어느 정도 껏 만성이 되었다. 즉 이젠 그런 말이 나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엄마도 속이 상했을 것이나 듣는 나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도 운동을 할 때면 내 스스로도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것도 못하면 차라리 죽어라고 그럴 때면 내 속에선 악이 발동했고, 기를 쓰고 운동을 했었다. 그렇게 운동을 하면 악(기)을 쓰고 한 보람이 있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운동할 때고 엄마가 차라리 죽으라고 말할 때면 엄마의 마음도 그렇겠지만 내 마음도 편하지 못했다.
예전 내가 가출을 시도한 것도 죽으란 말 때문이었는데 엄마는 그 말을 너무도 쉽게 한다. 성경에 너희가 말한 대로 될 것이다 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는데 그래서 난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상황을 보게 되었지만 엄마에게 그런 말은 당치 믿지 못한다.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예전 전도사님이 한 얘기가 있었다. 한 친구 전도사가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친구가 부모와 말다툼이 있던 날 오토바이를 타고 가출을 했었다고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 전도사는 자기의 말대로 어미에게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전도사님이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신 이유는 자기가 뱉은 말은 책임을 져라 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전도사님은 교회에서 정신지체아동을 함께 지도하시는데 그 일에는 봉사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봉사자로는 같은 교회 집사가 주로 맡아 해주시곤 했는데 그 봉사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얘야, 다음주에도 착한 일을 한다면 그땐 내가 널 데리고 우방랜드에 갔다오마'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착한 일을 했고 그 집사가 있으나 없으나 동일하게 그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집사란 사람은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결국 약속을 잊은 사람은 집사란 사람인 셈이다. 정신지체아동이라 함은 겉으론 나이가 들어 보일지 몰라도 아직 정신적으로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그런 천사 같은 아이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그 상처를 무엇으로 갚으랴! ! ! 그런 아이들이래도 알 것은 다 알고 있다. 어른들이(집사)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자기들은 거짓말이 나쁜 것이기에 하면 안됨은 물론이고 예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을 배웠고 너무나 잘 알고 있다.

[ 목욕 ]
커다랗고 수증기가 음산하게 덮어버린 대중목욕탕에서 몸을 불리기도 하고 때론 사우나 실로 가서 뜨거운 공기에서 생 땀을 빼곤 그렇게 한 것은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학교 후문을 통해 자격증에 관한 사무를 보는 곳에서 맞은 편 건물이 목욕탕이었었다. 일주일에 한번은 목욕탕에 갔었는데 평일이어서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오로지 나뿐이었다. 표를 받고 2층으로 올라가서 옷을 벗고 혹시 다른 사람이 있나 한번 빙 둘러보곤 휴게실에서 욕탕으로 갔다. 난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옛날 아니 항상 뜨거운 물을 가둬두는 곳에 몸을 담갔다가 탕 옆에 있는 때밀이 기계로 가서 몸의 일부분의 국수를 밀었었다. 난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때를 바라보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보곤 했다. 그리고 바가지에 차가운 물을 퍼담고 사우나 실로 들어간다. 난 피부를 통해서 나오는 땀은 나에겐 또 다른 쾌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우나실내에는 실내 열을 감지하는 센서가 있는데 실내의 온도가 내려가면 그 센서가 알고 뜨거운 김을 내뿜는다. 그런 것은 그 안에서 있어보니 자연히 알게된 것이었다. 난 뜨거운 것을 좋아했는데 실내 온도는 사우나 하기에 적절하다고 하더라도 난 뜨거운 것을 좋아했기에 센서에다 찬물을 부어버린다. 그러면 기계가 크르륵 하는 트름을 하는 소리가 났으며 곧 뜨거운 김이 다시 실내로 들어온다. 난 그렇게 목욕을 즐겼다.
그러다 교통사고를 겪은 나로선 예전의 그런 목욕은 마음으로만 할 뿐이다. 해마다 6월 6일 현충일엔 밀알이 장애인을 데리고 감포로 간다. 삭막한 대구에서 시원한 바다를 봄은 보는 것만으로도 장애인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한다. 바닷가 감포에 있다가 경주로 장소를 바꾸는데 우리가 간 곳은 온천관광호텔! 거기에서 묶은 때를 빼라고 목사님이 선택한 곳이었다. 온천물이라 특별하게 다른 점은 찾아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뭔가 다르겠거니 하는 맘으로 먹어도 보고 사우나에 들어가기도 했다. 사우나에서 오래있지 못함이 아쉽지만 기분은 좋았다.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가 대구서문교회이다. 서문교회가 장애인을 위해서 만든 프로그램이 있는데 장애인을 위한 목욕봉사가 가장 우선한다. 내가 처음 교회에서 목욕을 하던 날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취재를 하러 왔었다. 여러 장애인이 있었으나 대화하기가 쉽지 않은 뇌성마비 장애인이 대부분이라 그나마 말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내게 인터뷰를 청했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라고 묻기에 난 기분이 좋아 흥분한 상태였다. 정말 좋아요 기분이 최고에요 란 말만했었다. 그렇게 서문교회와의 만남을 통해서 인지 복현동 교회와 이별을 하고 서문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서문교회는 나 같은 장애인이 몇이 함께 섬기고 있다. 서문교회는 12층인데 각 층마다 쓰는 내용이 달랐다. 그 중 6층은 어린이 놀이방 7층은 컴퓨터실 8층은 중증 장애인이 쓰고 12층은 장터사랑부가 있었다. 하지만 2004년엔 8층 사랑2부와 12층 장터사랑부가 하나로 합쳐진다. 지금 난 3부 예배를 드리고 12층의 사랑2부로 간다. 벌써 이렇게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엘리베이터가 있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간혹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망설이는 교우를 보곤 했지만, 차츰 그들이 우리를 자주 보게되자 아 저들도 우리와 다를 뿐이고, 믿음에 대해선 더하면 더했지 결코 빠지지 않는 영을 가졌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난 자주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건 평소 습관일 뿐이다. 평소 내가 대하는 건 책과 컴퓨터이기 때문에 난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하며 살고 있다. 또 운동도 하면서
내가 장애를 입고선 일주일에 한번 목욕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목욕탕은 꿈에서조차 나를 외면했다. 그렇다고 때가 번들번들 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청결을 자랑하는 엄마가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여름에는 화장실에서 씻고 날씨가 서늘해지면 거실에서 씻는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나나 아버지 모두 엄살이 심하다. 아파트에 있었던 일이다. 화장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서 몸을 담갔다. 실올라기 하나 없는 몸으로 욕조에 들어가자 너무 뜨거워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었으나 그렇게 몸을 쓸 수 있다면 오죽 좋겠으랴만 앗뜨거 앗뜨거 라고 말함과 동시에 몸이 한번 긴장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뜨거웠던 물은 따스해 졌다. 그러면 난 욕조에 누우려고 한다. 욕조의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몸 전체가 물에 가라앉기란 쉽지 않았다. 난 물이 좋다. 특히 맑은 물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목욕을 하며 물을 먹지 못한다면 뭔가를 빠트린 기분에 허전하다. 더구나 추운 날에 목욕을 하려면 이왕 뜨거운 물을 배속에 넣어둔다면 추위를 한풀 이겨내기가 쉽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교회에서 목욕을 도와준다면 정말 좋으련만 교회에서도 만만치가 않은가 보였다. 결국 엄마가 목욕을 시켜주신다면 난 여기가 아프다느니 거긴 하지 말라는 듯 소리를 쳤었다. 그런 건 나의 과거였고 요즘엔 이왕이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간혹 무지 아플 때가 있다. 목욕을 하고나면 나는 뜨거운 물을 마셔야 했다. 엄만 내가 더 시빠지게 했는데 지가 아프다는 둥 물까지 먹으니 만약 내가 죽고 없어진다면 누가 널 목욕 시키겠느냐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고마운 줄 알아라 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난 아무런 말을 못한다. 아 어머니 은혜를 어찌 잊으리요

[ 재활운동의 성과? ]
난 운동을 이렇게 생각한다. 헬스클럽에서 운동기구를 만지며 하는 것도 운동에 속하지만 장애인은 특별한 사항에 속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난 아침에 눈을 뜨면 이부자리에서 다리를 뻗었다 접는 상황을 묘사해 밤에 잠자고 있던 근육들을 일깨운다. 그리곤 아침밥을 먹는데 내 동생 방으로 기어간다.-기어가는 것도 중증장애인에겐 힘이 든다-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일터에 가신 아버지가 돌아오신다. 아버지와 엄마의 도움으로 보행기를 탄다. 이런 간단하게 생각되는 일을 난 운동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P병원을 퇴원하고 집에서 운동을 했었는데 그땐 아직 내 뜻대로 앉고 누워있지를 못했었다. 아파트 내 방은 거실 겸 방이었는데 내가 퇴원을 하자 아버지는 보행기를 사 오셨는데 휠체어도 사고 보행기도 사고 아버지는 내가 곧 걸으리라 생각하셨나 보였다. 난 앉고싶어도 앉을 수 없었고 눕는 것도 그랬다. 아버지께서 문지방 위에[다 줄을 메어놓으셨다. 이유는 다리의 주기를 빼기 위해서 잠을 잘 때 달아놓게 위해서 그렇게 달고서 잠을 청하면 다음 날 아침이면 발의 붓기가 가라앉았다. 난 내 다리를 메단 줄을 당겨서 앉곤 했는데 그럴 즈음 아버지께서 내 손이 원래대로 돌아오길 바라며 컴퓨터를 사오셨다. 펜티엄 컴퓨터로. 당시 난 586컴퓨터는 처음이었는데 예전 내가 고등학생 일 때 컴퓨터 학원에서 배웠던 기억을 더듬으며 컴퓨터를 다뤘는데 인터넷도 잘 모르던 시기라 인터넷은 전화선으로 연결해 쓰곤 했었는데 매갈 말일 경에 전화요금은 엄청났었다. 부끄럽게도 일본 여자아이의 수영복 관람을 위해서 허비된 요금이었다. 장장 이십 만원이나 나왔으니 그땐 전용선을 모르고 있을 때였다. 암튼 그렇게 나왔으니 나로선 할 말이 없었다.
그 시절 그렇게 앉았고 저녁이면 보행기로 몸을 실었었는데 어정쩡하게 메달리는 격이었다. 난 다른 사람들보다 무게가 많이 나갔는데 내가 내 몸무게를 이겨내지 못했으니 그러다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고서는 한 동안 운동을 못했었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못하다가 어느 날 보행기를 탔었다. 그간 운동을 못했기 때문에 내 스스로 운동을 하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행기에서 난 몸을 일으켰고 그런 자세에서 몸을 움직였다. 그 옛날의 내가 아님을 실감했다. 그리고 이사를 와서는 줄을 없애 버렸는데 어느 날 내가 부모님에게 몸을 맡겨 화장실을 갔을 때의 일이었다. 거실에 휴지통을 두었는데 그 휴지통을 의지하고 옷을 추스렸었다. 또 시간이 가고 휴지통을 의지했던 기억을 추억하며 제 자리에서 힘이 있는 왼 팔을 지렛대 삼아 앉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나이지만 화장실은 아직 못하고 있다. 아니 갈 수는 있지만 좌변기에 몸을 올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내가 변을 해결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난 다른 사람(장애인)이 중증 장애용 좌변기에서 생각해 다른 방법으로 변을 해결한다. 그러나 난 어쨌든 장애인이다. 그것도 중증
예전엔 신문지에 대변을 보곤 했었는데 지금은 쓰레기통에다 비닐봉지를 뒤집어 좌변기에 앉는 것처럼 해서 대변을 해결한다. 지금은 좌변기에 앉는 연습을 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마루에서 축축한 화장실로 가는 것도 문제고 다시 좌변기에 몸을 얹는 것도 문제이지만 나의 투쟁은 계속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나의 몸의 상태도 발전하기 마련이다. 너무 재촉하지 마시라
나는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삶을 공개하기 위함이고 인정(?)을 받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장애인의 삶을 알리고 싶음도 있다. 장애인 중에는 나같이 중도 장애인도 있고 뇌성마비 장애인 정신지체장애인 전신마비장애인 등이 있지만 요즘같이 교통이 발달한 시대에는 중도 장애인이 많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나도 그런 중도장애인에 속한다. 그것도 중증으로 말이다.
예전 내가 장애인 날 행사 중 지체장애인 협회에서 시험을 치른 적이 있는데 그 날 경북대학생이 취재 차 만난 적이 있다. 그때 한 장애인이 열변을 토 한 적이 있는데 그 분의 말로는 여러분도 언제 무슨 일로 장애인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나 편견을 없애달라는 말리 기억이 난다. 또 다른 한 분은 경북대 학생을 무척 반가워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처럼 학교를 다니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 사람이나 나나 똑같은 처지임을 느낄 수 있었지만 다른 점은 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었다. 옳게 믿는 사람은 상대방의 행동이나 언변(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갸름할 수 있다. 최소 내 경우엔 그렇다.

요즘 난 컴퓨터로 글을 쓴다. 이상하게 아마 유전이겠지만 아버지가 그랬듯이 난 뜬금없는 생각과 허무맹랑한 얘기를 잘 만들어낸다. 예전엔 그랬었다. 아버지가 너무도 뻔한(거짓말) 말을 하면 아버지는 내 눈치를 보신다. 찔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고 내가 그냥 모른 척 하면 아버지는 기가 살아난다. 거창하게 거짓말을 하시기 때문이다.
운동?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운동을 할 것 같다. 언젠가 결혼도 하겠지 아내를 위해서도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운동을 할 것이다. 쭈∼욱
[ 밀알선교단에서 ]
내가 밀알을 처음 알게된 계기는 복현동에 있을 적 교회 목사님(대학부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같은 회원이 병원에서 지내고 있고 믿음이 있는 장애인이라 생각하고 믿는 장애인을 위한 교회를 알아보니-사실 신학교에 밀알 이라는 단체가 동아리 형태로 있었다.-밀알을 소개시켜주셨다. 그렇게 밀알을 가게 되었다. 당시 밀알은 월요일에 모임을 가졌는데 가서보니 나보다 장애가 심한 형제가 많았다. 나도 장애인이면서 그들을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래서 그들을 대할 때면 난 비장애인 득 정상인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자기 주제도 모르고 있었던 때라 생각한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 ! 밀알에선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 있었는데 그가 그 유명한 '앉은뱅이 꽃'영화의 실제주인공 이었다. 그는 시인이기도 했는데 난 급 분의 영향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밀알의 여자 간사 중에서 옛날의 어불도 보건소 소장을 닮은 간사가 있었다. 그 간사는 나중에 '수화통역사'가 되었는데 내가 알기론 대구에서 1호로 알고 있다. 내가 삐삐에다 사랑하고 싶다느니 말을 남겨 간사를 괴롭혔었다. 밀알이 세를 들어 살고 있었는데 밀알이 이사를 두어번 했야 했는데 신암동(복현동과 이웃해 있었기 때문에 집과 가까이 있어서 편했었다.)에서 대명동으로 이사를 했다. 작은 봉고차로 복현동에서 대명동 밀알로 가야했는데 남자간사가 운전과 우리를 태우곤 했다. 밀알에선 남자 간사가 항상 모자란 실정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다고 자청한 사람도 있다. 대명동으로 이사간 밀알은 많이 발전을 했다. 먼저 대구대학교 밀알 동아리 회원이 늘어났으며 덩달아 간사로 섬기는 자매가 많았다. 밀알은 그렇게 내적으로 외적으로 삼기는 이가 많다. 나도 밀알에 그렇게 섬기고 싶으나 늘 마음뿐이다. 난 밀알로 가는 중 차안에서 간사의 말에 문득 성남의 그녀가 해준 말이 생각나 집으로 돌아와 글을 썼다. 제목은 '미션' 내용은 신학생들이 아마존으로 선교여행을 간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에게서 들은 내용은 그들이 밀림을 헤치며 나아갈 때 그들 중 한 사람이 그들 부족은 모두 옷을 벗고 있다며 말했고 그들도 옷을 벗었다고 말하며 내게 제환씨, 이 얼마나 참스러운 선교인가요? 라고 물었지만 난 아무 말을 못했다. 그것을 참고삼아 미션이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갑자기 생각이 나고 갑자기 나의 영이 눈을 떴다고나 할까 줄줄 써나갔다. 그렇게 쓴 것이 분량이 많았다. 하지만 그땐 소설이 뭔지도 모르던 때! 다시 써야한다 언젠가! 밀알이 다시 봉덕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것이 지금의 밀알이다. 난 밀알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으며, 밀알을 통해 나의 영이 살찌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믿음이란]
왠 뜬금없는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난 귀신을 믿는다.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정확히 표현하겠다. 난 귀신을 신처럼 여겨지지는 않는다. 난 귀신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해야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
언젠가 내가 다니는 교회 모임에서 한 아이가 귀신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귀신이 무섭다고 말했었다. 그때 사랑2부의 담임 집사가 했던 말을 난 아직도 생생하다. 집사는 그 아이를 달래려고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사의 말을 들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견해가 너무도 차이가 있었다. 크리스챤을 흔히 예수쟁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나 누가 날 예수쟁이라고 부른다면 난 기쁠 것이다. 사실이니 난 예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으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 성경에 삼위일체란 말이 있다. 풀어서 성부聖父 하나님, 성령聖靈 하나님, 성자聖子 하나님이 모두 한 분을 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시다.
연말엔 TV에선 예수님의 승천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영화화되어서 나온다. 성경에서 신약 부분을 극화한 것이다. 그 영화의 백그라운드는 성경이다. 성경에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쳤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성경을 믿는 사람이 성경 속에서 나오는 귀신 사건을 믿지 않겠다는 건 하나님 곧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 !
그러면 그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맥을 만들기 위해서? 교회가 이 사회에 너무 많아서 그러니까 교회를 통해서 장사나 성공을 하려고! 웃기지도 않는다.

난 하수도에서 떨어졌다가 살아난 이유는?!
동전이 내 목으로 넘어가 숨이 막혀 있다가 동전을 토해내고 살아난 것은?!
내가 뜨거운 하수도에 빠졌다가 살아난 것은?!
내가 오토바이로 알지도 못하는 트럭과 부딪혀 살아난 이유는 아직 하나님이 날 쓰시기 위해서이고 나의 바램인 문서 선교사의 길을 가기 위해서임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제 글을 보는 사람에게 꼭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엄마가 나의 팔을 거의 강제로 운동시키실 때 난 눈을 뜨자마자 앉은 상태에서 팔을 이리저리 내두른다. 그리곤 누워 다리운동을 한다. 밤이 되면 몸의 근육도 쉰다고 했다. 그래서 근육에 긴장을 넣기 위해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엄마가 내 다리를 잡고 뻗었다가 오므리는 운동은 쉽지만 내 발을 잡고 발꿈치를 접는 운동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엄만 인석아 힘을 빼 라고 말씀하신다. 난 힘을 빼려고 하면 더욱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힘이 빠졌다고 하더라도 엄마가 이 때다 하고 잡으면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엄마는 울화통이 터져서 몽둥이(등글개)로 날 개 잡듯이 내게 날린다. 엄마는 나의 약점을 잘 아신다. 엄마는 나의 약한 부분에 등끌개로 때리신다. 온갖 험한 말을 부침개로 곁들여서 그러면 나는 나대로 맘에 없는 말을 한다. 엄만 기가 차다며 이런 꼴을 교회사람이 봐야 한다고 니가 교회를 왜가냐고 나의 약한 마음을 가시가 돋힌 바늘로 찌른다. 그렇게라도 말하는 엄마의 심정을 알기에 난 고개를 숙인다.

왜 하나님은 가난 한사람이 더 많은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자신으로 손으로 만든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부유한 사람은 궁핍한 사람을 도우며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석하면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여기 뜻깊은 성경말씀을 써 볼련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아모스 5장6절)=여기에 대해 난 기도한다. 내주 아버지 주여, 부족한 내가 찾으오니 저를 구원하소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 50편 23절)=전 항상 감사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건 주님께서 아십니다. 제사 항상 감사를 드릴 수 있음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세상이 주는 평안보다 영생을 약속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복음 16장 24절)=감사합니다. 전 받았으며 기쁨을 누립니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편 50편 15절)=제가 어려울 때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주님을 부르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장 18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감사합니다. 제가 기도할 때에 먼저 하나님나라를 구하겠습니다.
"주께서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이사야 40장 26절)=저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 만으로도 기쁩니다. 저를 사용하여 주소서.
이런 것 말고도 많이 있으나 줄이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 교훈과 책망,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기에 광범위한 말씀을 극히 일부분으로 쓰려니 부족한 저로써 삼가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전 말씀(성경)을 묵상하며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 생각되면 형광펜으로 줄을 치며 포스트잇에 느낀 감정을 쓰곤 합니다.

-끝-

[ 에필로그 ]
제 글은 순전히 저의 경험담입니다.
글 중에 나오는 장면 역시 제가 겪은 장소입니다.
논산도 그렇고 광주와 해남 역시 그렇습니다.
그 중 해남은 저에게 있어 제 2의 고향이라 할 만큼 정이 깃든 곳입니다.
그 중 어불도는 더 그렇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가고픈 장소입니다만 상상만으로 만족해야겠지요
왜냐면 아시지 않습니까
전 장애인입니다. 예 갈 수도 있겠지요 아니 가겠습니다.
얼마나 변했는지 소망교회는 변함이 없는지 제가 세운 십자가도 봐야겠지요
전 해남에서 있었던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할 겁니다.
지금은 대구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니깐요
지금도 저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이 많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시험에 빠진 사람이 여럿 있다. 기독교에선 믿음에 시련이 오면 이것을 시험이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늘 시험을 받고 있다. 그나마 기도와 복음송으로 버티고 있지만 난 '음욕'에 잘 넘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고 있으면 그 자는 간음이나 음란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겉으론 전혀 그렇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으니 이 얼마나 교만인가 주여 용서하소서 또 있다. 내가 기도에 영험이 있다고 말을 했었나 보였다. 물론 그건 내가 기도문을 적어가며 기도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기도한 것들이 모두 이루어 졌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고 자만도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나를 우시며 바라보셨을 것이다. 이 또한 교만이라고 하나님은 교만을 제일 싫어하신다. 우상숭배? 역시 교만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악식일 엄수? 이것도 난 교만이라고 생각한다.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그 시간에 난 바빠서나 이 정도야 하는 생각이나 행동은 모두 교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자신감을 가졌으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징계, 아니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좋았을 것을 난 이런 것도 깨닫지 못했으니 이제야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려니-주여 감사합니다-
기도는 뭔가 필요해서 주로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기도는 우리의 일상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저요? 니 자신이나 똑바로 하라고요 예 전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제 주변에 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를 한다면 그 사람이나 당신에게도 영에 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고민이 있습니다. 제 동생 네가 불교를 믿는다는 겁니다. 매제네 부모가 불교신자라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꼴이지만 그렇지만 제 동생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아직 죽어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지만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서는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넌 살았을 적 무슨 짓을 어떻게 하고 다녔느냐 고 묻는다고 합니다. 예수를 모르는 자나 외면한 자나 타종교를 믿던자들에겐 심판의 정도가 심하겠지요
제 동생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어린아이를 좋아하고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사랑하며 섬길줄 아니깐요 그러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닐런지요
행복하세요
부족한 글 읽어주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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