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바랜 일기- 버려진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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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구구 늦었네요. 허겁지겁 달려온 저는 달님과 가로등 아저씨와 별님에게 휘휘 저어대던 팔을 접을 수 밖에 없었어요. 왜냐구요 … 가로등 아저씨의 발 밑에 웅크리고 있는 더러워진 등이 보였거든요. 동그래진 눈으로 가로등 아저씨에게 다가섰지만 오물거리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네요. 누굴까? 궁금해진 저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워 졌지만 코끝을 찡하게 하는 악취 때문에 뒷걸음질을 했어요. 한달은 넘게 씻질 않았나 봐요… 이 한여름에 시커먼 때가 켜켜이 붙은 겨울 잠바를 여미고 자고 있다니 … 혹시!! 죽은 건 아닌가 싶은 마음에 겁이 났어요.
[가로등 아저씨] 쉿! 놀라지마 … 그냥, 사람이에염.
제가 뭐라 하기도 전에 가로등 아저씨의 짧은 손가락이 입을 막았어요. 아마도 … 깰까봐 걱정이 됐나보지요? 아는 사람 인가 봐요 … 가로등아저씨도, 달님도, 별님도 … 그래서 그들의 눈동자가 축축한 거겠지요 … 그래서 가로등 아저씨의 얼굴이 어두운 거겠지요. 너무 밝으면 잠을 잘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죠.
달님은 웅크린 사람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내려다 보구요, 별님은 울었는지 주위가 뿌였내요. 아주 … 불쌍한 사람인가 보죠? 그러니까 혼자서 버려진 채로 잔뜩 웅크리고 있잖아요. 이 한여름 밤에 두꺼운 잠바로 숨어서 볼품없이 엉클어진 머리끝만 내밀고 있는 거겠죠?
너무나 궁금했어요. 누군지 … 혹은, 무슨 일로 이렇게 있는 건지 … 하지만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할 것 같지가 않아서 한 참을 그들을 빤히 올려다 보다가 집으로 돌아 왔어요. 집으로 타박타박 걸어 오면서 여러가지 상상을 해보았지요.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는 거지를요.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거지를요. 단순한 호기심 이었지요. 아마도 사업이 망해서 모든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겠거니 … 아주 큰 죄를 짓고 버려진 사람이겠거니 … 가족도, 친구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겠거니 … 아니면, 일하기 싫어 아무렇게나 뒹구는 실패자이겠거니 했지요. 하지만 다 상상일뿐 궁금해서 가슴이 답답했어요.
다음날 저녁에도 그 거지는 가로등 아저씨의 발밑에 웅크리고 누워있었어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지요. 더 빨리 왔으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었을 텐데 … 가로등 아저씨한테 물어볼 시간이 있었을 텐데 …
[가로등 아저씨] 이제 막 잠이 들었어염 … 조용히 있어야되염…
체때212 가로등 아저씨의 조그만 목소리에 심술이 났어요. 종일 궁금해서 답답했는데 아무런 설명도 안 해주다니 … 그까짓 거지가 뭐 대수라고 친구들은 조용히 침묵을 감수하네요. 궁시렁 왕인 가로등 아저씨도 입을 꼬옥 다물고 얼굴 빛을 흐리구요, 이쁜 노래를 부르는게 취미인 별님도 가만히 눈만 껌벅이고 있어요.
조금은 서운도 하네요. 전 … 적어도 그들의 친구인데. 아무것도 아닌 거지가 친구들의 배려를 한몸에 받고 있으니 말이죠. 후후 … 겨우 거지한테 억울함을 느끼다니 저는 참 옹졸한 사람인지도 몰라요.
고작 돌멩이들을 발로 툭툭 쳐대기만 하다가 친구들의 눈치만 보다가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어요. 반쯤 오다가 뭐라고 딱히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다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어요. 쿠쿠쿠 … 정말 옹졸하죠, 저 …
[가로등 아저씨] 이 사람은 … 그냥 … 버려진 인형이에염…
누구냐는 저의 신경질이 섞인 물음에 가로등 아저씨의 대답이었어요. 그게 … 버려진 인형이라니 … ‘거지야’라는 대답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이네요. 달님만으로 충분한데 … 그런 어려운 대답은 말이죠.
찡그려진 저의 이마를 본 달님이 희미하게 웃네요. 좀 더 쉽게 설명해 달라고 말하려다가 말도 안돼는 자존심이 입을 다물게 했어요. 그래서 전 ‘아~ 그래요’하고 대답해 버렸어요.
사실은 모르면서 …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
일상이 되버렸어요. 항상 저보다 일찍 가로등 아저씨의 발밑에 웅크리고 있는 거지를 보다가 친구들의 눈치만 보다가 다 안다는 듯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거요. 익숙해 진다는 게 … 사람을 이렇게 둔하게 만들 수 있나보죠. 이젠 그 거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그런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듯 … 웅크린 등이 거지라는 것으로 충분해져 버리더군요. 저 자리가 거지의 몫이 였다고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는데 설득당해 버렸어요. 참 … 우숩지요.
원래 그런거야 …
란 말이 그러면 된다는 게, 더 이상 설명이 있을 수 없다는 게 된다는 거죠.
[가로등 아저씨] 버려진 … 인형 … 이제 안와염.
에? 거지가 없다니 … 여기에 있어야 할 그가 도대체 어딜 간단 말이에요?
[달님] 주인이 그를 데리고 갔어.
에?
주인이라니요? 그 거지한테 주인이란 게 있었어요?
[별님] 하늘에서 … 주인이 데리고 갔어요.
이젠, 웅크리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어요 … 이젠, 행복할꺼에요.
하늘에서 … 그럼, 죽어버렸다는 말이겠지요? 이 여름에 얼어 죽었을리는 없고 … 배고파 죽었나요? 아님, 병으로 죽었던지 … 왜 제가 눈물이 날까요. 거지가 죽었다는 것 뿐인데 … 아무런 상관이 없던 거진데 말이죠. 살아있는 게 오히려 불쌍했을 거지일 뿐인데 …
[가로등 아저씨] 이것 봐염 … 선물도 주고 갔는데염 …
거지가 선물을 하다니 피식 웃음이 나왔어요. 오히려 가로등 아저씨의 커다란 신발에 악취만 베어놓고 가버린 거지가 선물을 주다니요.
[가로등 아저씨] 정말 이라니까염!! 일루와봐여 … 자 봐여~~
가로등 아저씨가 짧은 다리를 있는 힘껏 제게 내밀어 보이네요. 쿠쿠쿠 … 가로등 아저씨는 너무 귀여워요 … 하지만 거지한테 베어버린 악취 때문에 다가서기가 망설여 지네요. 코끝을 꼬옥 쥐고서 가로등 아저씨한테 갔어요. 역시 호기심에 어쩔 수 없이 모험을 했어요. 냄새에 예민한 저에겐 모험이나 마찬가지죠.
가로등 아저씨가 내민 커다란 신발 모퉁이에
거지가 준 선물이 있더군요.
아주 …
어눌하게 몇 번이고 꾹꾹 눌러쓴 글자들이
버려진 인형이 얼마나 행복할 지 말해주고 있더군요.
사
랑
해
.
.
.
친구들이 그러는데요… 주인한테 갔데요.
버려진 인형을 그렇게 사랑해 주던 주인한테로…
그래서 말이죠. 적어도 주인을 찾지 못한 인형들 보다는 행복할 꺼래요.
… 아마도 친구들의 말이 맞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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