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 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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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 간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머리에 하얀 눈 서걱서걱 얹으며 낮아지는 키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걸어가야 하는 길목에 다다라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엔 나비 한 마리 잡으려다 길을 잃고
그 다음엔 사랑을 잡으려다 길을 잃고
그 다음엔 닥치는 대로 잡으려다 길을 잃고
결국 그 지나온 길 모두 잃고
한 평 반 남짓 묘자리를 잡기 위해
지팡이 하나 달랑 의지해야 되는 것이 세월의 법칙이렷다.
인생의 길을 한 번씩 잃을 때마다 생겨난 마디 마디가
마치 사진첩처럼 지나온 生을 담아내고 있으니
인생은 한 그루 대나무이다.
계절의 끝 옷벗은 나뭇가지마다엔
우수수 공수표의 음산한 웃음소리,
인생의 된서리 맞으며 시리디 시린 뼈마디 추스리며
헐벗고 가는 게 늙어가는 세월의 서러움이리라.
정녕 늙어 간다는 건 아픔이다.
거칠거칠해지는 피부, 번져가는 죽음의 반점, 약해지는 뼈마디,
세상사와 멀어지는 눈과 귀......
언젠가 버스 안에서 어느 할머니 한 분이 날 보고
"아휴, 피부가 곱기도 하네." 라고 하셨다.
젊음이 부러운 듯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 보시며.
피부가 고운 편도 아닌데...... 가슴 한 쪽에서 찬 바람이 살랑 일었다.
나 또한 나보다 젊은이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 감출 수가 없다.
우리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비해 너무나도 가진 게 많은 그들.
내가 좀더 젊었더라면 이런 걸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콧잔등이 찡해 오기도 한다. 못해 본 게 너무 많고 못 가져 본 게 너무 많아서.
아직 젊은 계절에 서 있는 나도 이런 생각이 드는데
그나마 가진 몸뚱아리 하나마저 잃어가고 있는 노인들이야
그 심정 오죽하랴.
난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내가 늙어지면 이런 모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러니까 한 편의 영상을 떠올리게 되는데,
혹시 어느 영화에서 보았음직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낙엽비가 내리는 계절,
길가엔 군데 군데 수북이 나뭇잎 무덤 이루고
가로수가 한없이 이어져 있는 길,
그 길을 아주 편안한 복장을 하고
걸어가는 두 노인.
주름진 손을 꼭 잡고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 뒷모습엔
발갛게 노을이 지고......
그들의 삶이 무르익은 황혼녘
그 날 바로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다 해도
결코 놀라지 않고 잔잔한 미소로 삶을 떠날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生의 이별이 또 어디 있으랴.
아니면 아름드리 은행나무 아래 기대고 앉아
지난날의 추억을 하나씩 꺼내 읽으며
내리는 낙엽비에 묻혀 그대로 하나의 무덤이 되어 버리는 것도 좋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죽음마저 아름답게 맞이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준비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을 테니까 마음이 괜시리 바빠진다.
한 순간 이룰 수 있는 꿈이란 결코 없을 것이기에.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떤 존재였던가?
어느 겨울 창밖에서 들여다 보이는 따뜻하고 포근한 집안의 분위기.
바로 그런 정서를 느끼게 하는 존재이리라.
창밖엔 함박눈이 소복이 쌓여 가고
난로 위 주전자에선 음악처럼 김이 폭폭 오르고......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와
카펫 위에서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늙어지는 게 슬픔이긴 하지만 그런 포근함으로
가족의 따뜻한 난로와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는 건
정말로 축복받은 사람들이 차지할 몫일 것이다.
늙어지는 게 슬픔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곁엔 언제나
어린 시절의 자신이, 청년 시절의 자신이, 자신이 지나온
숱한 존재들이 늘 주위를 맴돌며 말을 건네 줄 것이기에
혼자라도 결코 혼자가 아닐 거라는 생각 또한 해 본다.
먼 미래가 어느 새 어제의 일로 둔갑해 버리는 요술같은 세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말로 얼마 안 되리라.
그나마 벌써 이만큼 와 버렸으니.
인생의 저녁놀이 한창일 즈음 지난 날을 떠올리며
추억의 찬거리가 풍성한 식탁을
하루 하루 기쁨으로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정말 꿈같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누구나 꿈은 꾸는 법.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동화를 꿈꾸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한 번 웃으면 수명이 연장된다고 하던데,
죽음도 아름답게 맞이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자.
그러다 보면 살아갈 날이 조금씩 늘어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한 번 더 웃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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