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차 한잔 마시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 보세요
금연일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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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일기 (9)



hey negro one cigarette give me



앞마을에 미군 부대가 들어섰다
규모가 적은 공병부대였어
산 속에 교실 한 칸 크기의 탄약고를 수십 개 만들고 철길 새로 놓느라고
경북 왜관에서 왔었지 그 부대에 딸린 많은 민간인들도 함께 이주해 왔었지



자연히 미군들이 득실대기 시작하니
부대가 앉은 마을엔 몇 달 사이 나이트 클럽이 예닐곱 군데 생겨나고
미장원 당구장 다방 양복점 양장점
갖가지의 상점들이 즐비하게 생겨났어
밤엔 네온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팝인지 째즈인지 알 수 없는 노래 소리가 저녁이면 울려 퍼지고
전형적 농촌마을이 갑작스레 도시화가 되어버렸어


그런데 지금도 알 수 없는 것은
왜 그 부대엔 흑인들만 있었는지
내가 보기에는 온통 깜둥이만 보였거든
우리끼리는 노가다 부대니까 질 낮은 놈들만 모인 부대라 믿었지
지금은 미군들은 없어
질 좋은 한국군이 지키고 있어



미군부대 땜에
당연히 촌놈들은 가치의 혼란을 겪었지
개방적인 양공주가 농염한 옷차림으로 마을을 돌아다니고
여름철엔 저수지를 해수욕장처럼 여겨 수영복 차림으로 활개치니
노인네들께서 난리가 났었지 동네 다 버린다고
열셋 나이의 나도 신기한 세상으로 보였어



생전에 보기도 못한 희안하게 생긴 중장비가 산허리를 왔다갔다하더니만
한두달 만에 치도를 만들어 내더구나
부대에서 탄약고까지의 길이였지
그때 젊은 사람들은 탄약고 공사판에 끼어 들려고 야단들 이였어
아마 인건비가 꽤나 높았나 봐
돈 구하기가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으니까
그땐 일주일 단위로 임금을 주었던 것 같아 내 기억으로



산허리에 난 치도 위에 우리 밭이 있었지 서마지기 정도
콩잎이 누렇게 익어 가는 가을날
할머님 따라 밭에 갔었지 콩잎 따러
재미가 없어 밭가에 앉아있노라니 심심하기 짝없었지
심심하던 차에
멀리 치도 끝에서 흙먼지 날리며 달려오는 미군트럭이 보였다
잘되었다 싶어 트럭이 가까이 오자 길을 막고 버티어 섰지
트럭은 공손히 내 앞에 멈추더구나
경적울림도 없이



흑인병사였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무슨 말을 내게 했어
당연히 난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
그야 내 영어실력이 형편없었으니까
뭐 실력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지
운전석 옆 발판에 뛰어 오르면서
난 크게 왜 쳤어
『hey negro one cigarette give me』


흑인병사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뭐라고 한참이나 떠들더구나

속으로 그랬어
이 새끼 준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짜식 줄려면 주던지
안 줄려면 그냥 가던지
못 알아듣는 놈 무안하게



아 그런데
그 깜둥이 녀석 호주머니에서 지갑 비슷한걸 꺼내더니
하얀 종이와 잘게 썰은 연초를 조금 집어주면서
그 녀석은 폼 나게 연초를 종이위로 얹고는 또르르 말아
혀끝의 침으로 바르고선 그 유명한 지포 라이터로 또 폼 나게 물더구나
저렇게 말아 피우는 것도 있구나
담배 사 파울 돈이 없어 그런 것인지
아님 그런 애연가인지 알길 없었지만



『thank you』
내가 아는 영어는 다 동원했어
그 녀석 보내고
밭 두렁에 웅크리고 앉아
검둥이에게서 보고 배운 대로 담배를 말아보았지만
그런데 잘 안되더구나 생각처럼
그 연초 다 허비하고선 간신히 한 개피 말았어
어렵사리 불 댕겨 할머님께 드렸지



그 미군 부대가 온 이후로 주변 마을 사람들은 양담배만 피웠어
뒷산에 나무하러 가는 일꾼도 지게목발 두드리며 양담배를 피울 정도였으니까
그 시절 양담배와 양주는 좋은 선물로서 또 뇌물로 이용하였지
아마 선물과 뇌물로서는 최고였을 거야



철없던 어린 시절의 얘기라서 이해는 하겠지만
생각하니 소름끼칠 정도로 창피하네



21. . 23
금연 스무 아흐레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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