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날의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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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찮게만 여겨졌던 사소한 감정들이 작은 소중함으로 다가오는 어느 흐린날
문득 즐겨 마시던 커피 대신 녹차의 진한 향이 간절해지면 갓 끓여낸 상큼한 풀내음을 음미하며 잠시나마 한 시름 잊고 넉넉한 시간으로 나를 인도해본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의 좁은 방 이곳 저곳에 시선을 던지다가 지금은 먼지속에 묻혀가는 오래전 구입한 책들이 유난히 눈에 밟혀 그 중 한권을 꺼내들고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펼쳐진 페이지의 글을 읽어내려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맨 뒷장에 적힌 짧은 글을 발견하고는 그 위에 베인 삶의 잔향을 깊이 들이마신다
언제부턴가 책을 구입하며 그때 그때의 심정을 짧은 글로 옮겨놓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도 사람이란 가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밖으로 풀어내지도 못한채 꼭 꼭 감싸안고 잘도 버텨낸다는 생각을 하게 된 뒤로부터 반은 자의로 만들어낸 습관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기저기 조금씩 쏟아내야지만 그나마 조금 숨통이 트이는 그런 때도 가끔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 짧막한 글속에 왜그렇게 많은 감정이 실려있는지...
하지만 사람의 실제감정이 말로 또는 글로 표현되는 것 보다 훨씬 무거움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 지면위에서 어느정도 정화되어 있는 글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흐른 뒤 그 글속에서 불러온 감정에 다시 한번 젖어드는 것은 마치 아침에 잠에서 깨어 진한 원두커피를 자신의 기호에 알맞는 양의 물로 한 번 내려 마신 후 오후쯤 아직 남아 있는 그 향에 이끌려 빈 컵에 다시 커피를 채우는 일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우린 커피가 아닌 커피향이 그리운것일게다
그때문에 카페인을 거부하면서도 커피에 중독이 되어가듯 삶이 주는 여러 시련을 두려워하면서도 우린 그 속에 베어있는 삶의 그리운 향에 취해 긴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가끔은 커피향보다 녹차향이 그리워지듯 늘 느껴오던 삶의 향보다 색다른 향에 취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언젠가 길을 걷다 잠시 스쳐간,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낯선 얼굴들마저 그리워하고 싶은 어느 흐린 날, 바로 이런 날엔 모든 향이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알수없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 또한 가슴에 진하게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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