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는 사소함으로 채우는 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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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오르막길을 땅만 보고 걷는 저를 부르듯 낮은 가지들은 제 머리카락을 자꾸 헤집습니다. 가는 걸음 멈추고 뒤를 돌아봅니다. 꼬불꼬불한 길은 뒷사람의 흔적마저도 가려버리고 절 부르던 가지들만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이마에 맺은 땀방울을 씻어주려는 듯 갑자기 바람이 거세짐을 느낍니다.
잠시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아도 햇살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요? 눈을 감아도.... 햇살이며 나뭇잎이며 바람이며... 모든 것이 눈에 가득합니다. 이대로 그냥 한숨 자도 좋다 생각합니다. 배낭을 베게삼아 햇살을 여린 가지를 이불삼아 한숨자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눈을 감아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좋은 꿈 꿀 수 있겠다 싶습니다.
산을 오르면서 이렇게 산오르는 일이 곤혹스럽게 느껴진 적 없었습니다. 내딛는 걸음마다 밟히는 들꽃들... 이름없던 아니 이름 모르던 풀들이 모다 제 이름을 타고 나서 제 터에서 송이송이 말없이 피어있다하니.... 문득 김춘수님의 시가 생각이 나는군요.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굵은 등걸 아래 햇살마저 새어들 틈없는 그 곳에 오롯이 피어있던 들꽃... 내가 그 이름을 알기 전에는 그저 나무의 배경이었던 작은 꽃들... 깽깽이풀, 양지꽃, 현호색, 홀아비꽃, 별꽃...
어느 누가 처음 그네들의 이름을 불렀는지 모르나, 그냥 길을 가다 너의 모양이 나와같다 싶기도 하고 너의 모양이 마치 나를 유혹하는듯 하다 싶기도 하고 자그마하니 어찌 홀로 피어났나 싶기도 하고 네 모양이 마치 이것과 유사하구나 싶기도 하고... 꼭 제 이름이 아니어도 산을 오르는 나의 사소함으로 이름 새로 붙여도 좋을 것 같은 들꽃의 여백이 지금 이렇게 몇자의 글로 표현하려고 하는 나를 힘겹게 합니다.
다시 산을 오릅니다. 스스로 수고를 들여 들꽃을 살피지 못하고 혼자 몰래 엷은 잎사귀의 지저귐과 바람의 속삭임에 젖어있다 환호가 들리는 곳에서 잠시 걸음 멈추어 새로운 들꽃과 인사를 합니다. 책을 펼쳐들고 작은 들꽃 하나라도 놓칠세라 이리저리 살피는 사람들의 수고를 살짝 비켜서서 말입니다.
저네들은 그냥 꽃이 아닌 들꽃인지, 들꽃이 왜 끈질김의 영상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먼 길 품팔러 가는 사람들이, 산길 넘어 그리운 사람 찾아가는 사람들이, 과거를 보러가는 사람들이, 봄바람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산책나선 처녀들이, 약초캐던 효성 지극한 사내가 혹은 길잃은 누군가가...
때론 사랑을 고백하는 한 사내의 마음이 되어, 어떤 땐 깊은 병을 치유하는 약재가 되어, 때론 주린 배를 채우는 끼니꺼리로, 때론 서글픈 며느리의 마음풀이로, 때론 그리운 사람의 그림자로....
글로써 기록되지 않은, 말 못해 가슴에만 새겨진, 누구도 모르는 수많은 전설들이 숨어있을 것 같은 그 상상의 깊이가, 세월의 깊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사소함을 뛰어넘어 끈길김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냥 산을 오르다가... 들꽃을 빼고는 여백이 되어버린, 그래서 빈 길을 걷고 있는 듯한 큰 산의 공허를 이런저런 상상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그저... 길을 걷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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