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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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1년을 알고 지내오던 나의 지우(知友)가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통화 같은 것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던 그로부터의 전화에 의아해 하던 나는 꽤나 흥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너는 정말 멋진 사랑의 고백을 들어본 적이 있냐?」
「무슨 소리야? 느닷없이 전화를 해서는.」
그것은 다름아닌 그의 친구의 일이었다. 간혹 술자리에서 그의 친구가 처한 난처한 상황에 안타까워 하며 내게 그의 처신을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 나는 내 상황도 무척이나 복잡하던 터라 뭐라 할 말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다.
「그가 말이야. 주변의 모든 친구에게 두 장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말이야.」
「응? 어떤 내용의 편지인데?」
「내가 전에도 몇 번 말했었지. 그 친구가 묘한 오해에 말려들었다고. 그 오해는 다름아닌 친구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어.」
또 그런 내용이었구만 하고 생각한 나는 그의 난처한 상황은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듯 표정으로 보였다.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에 어찌할 바 없지만 친구의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세상의 법으로는 '배신'이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는 행위인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말이야. 그 친구는 친구의 여자친구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다만 모두에게 친절했던 그의 행동이 부른 마술에 모두가 걸렸던 거야. 그래서 그 친구는 변명할 수 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게 되어서 마침내 결단을 내렸던 거지.」
「어떤 식으로 말이야?」
「바로 친구의 여자에게 간접적인 프로포즈로 사랑을 고백하는 방법이었지. 지금부터 그 편지를 읽어 줄게.」
「자네에게도 그 편지가 왔단 말이야?」
「조용히 하고 잘 들어봐.」
<친구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로 남을 수 있다면……>
가슴이 빠개지도록 슬픈 나날들이었습니다.
세상은 기쁜 것보다는 슬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따스한 웃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위선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나의 무분별한(?) 친절이 다른 사람에게는 더러운 손길처럼 느껴질 수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나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엎드려 사죄합니다. 나의 오만함에 대해서, 나의 못됨에 대해서, 친구들은 나의 이 사죄를 받아줄런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아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 지를, 그네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고 싶었는 지를, 누구 하나 알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 나의 친구들은 나를 색안경을 쓰고 보았고 나의 겉모습만을 보고 내 모든 것을 판단했습니다. 나는 슬폈습니다. 먼저 내가 친구들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는 것과 나를 보는 그네들의 저주스러운 눈빛에 나의 슬픔은 응어리져 갔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들의 저주가 나에게서 그칠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미움으로 눈물 흘리게 될 한 약한 소녀에 대해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아파했고 슬퍼했습니다. 그 소녀의 아픔은 어쩌면 우리들보다 더 깊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소녀는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려 했습니다. 나는 그 소녀가 속으로 엄청난 슬픔의 보따리를 입술깨뭄으로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미워합니다. 나는 내가 아닌 그 소녀를 아프게 한 그들을 미워합니다. 그들의 잘못 또한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깨우치게 해 소녀의 앞에 고개 숙이게 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 소녀는 그러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서로의 가슴에 미적함이 남기는 바라지 않습니다.
친구들이여.
나는 용서를 빕니다. 나로 인해 눈물 흘린 사람들과 가슴이 찢어졌던 사람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용서를 빕니다. 모쪼록 더 큰 미움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한때라도 서로 사랑했던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부디 다른 곳에서 만날지라도 서로 어두웠던 일들은 잊고 마주서도록 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친구들에게 못다한 우정과 내 진실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버리고 말았던 그 소녀에게 작지만 남은 사랑을 바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친구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어떠냐? 아주 근사한 사랑고백이지 않냐?」
나는 한동안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혹시 그 사람을 내가 한번 만나서 이야기 해 볼 수 있을까?」
나는 그러고 싶었다. 그 사람의 안타까운 상황에 위로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숨겨진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모두에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한 그 무엇인가에 대해 그로부터 직접 듣고 싶은 심정에서 였다.
다음 날 부산 서면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그를 만났다. 생각과는 달리 말끔한 외모에 아주 밝은 모습이었다. 한동안 서먹한 듯 머리를 극적거리던 손이 담배 하나를 집어물고는 적막을 깼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편지에 대한 것도 들었구요」
그는 많이도 부끄러운 듯이 멋적은 웃음을 짓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참 궁금하더라구요.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런 고백을 하실 용기가 생겨났는지……사 실 제 생각으로는 모든 관계가 시간에 의해 흐지부지 될 거라고 추측했었거든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 나와 친구, 그리고 나와 그의 여자친구의 관계에서 답이란 있을 수가 없었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요.」
「사실이 아니었다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생각이……」
「그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는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니? 희망이라는 것은 말이야. 지금 막 배달된 편지와 도 같고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세계와도 같은 거래.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과 같고, 이 제부터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때래.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는 사실, 그리고 믿고 기다리는 것. 그리고 저 멀리 별똥별에게 빌어 보는 소원이래. 어때? 주위의 모든 것이 희망으로 가득하지. 그러니 너도 이젠 그만 아파하고 제자리로 돌아갔으면 해.'
「그 말이 나를 변하게 했죠.아함...오늘은 밤에 내 꿈 꾸라고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오늘 즐거웠어요. 저는 이만 돌아갈께요.」
나는 알았다. 그에게 그러한 용기를 주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다름아닌 희망이었다. 헤어날 수 없는 절벽 끝에서도 잃지 않은 희망이 있었기에 그는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 참으로 가슴을 상쾌하게 하는 로맨스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그 영화 속에서 나는 화려한 사랑이라는 주제보다 그 주제를 낳은 참다운 주제를 보았다. 그것이 희망이었고 나는 그것을 얻었다. 그리고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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