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면도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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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
거울 앞에 서서
내 속의 나와
거울 속의 내가
이야기 한다.
1.
또 하나의 내가 서 있는 그 앞에서
어제를 면도하는 나는,
어제를, 씻겨지는 면도잔해처럼 말끔히 잊고 싶다.
간혹 끈질긴 어제의 한 가닥이 피를 토하며,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잊혀지기 싫은가 보다) 해도
잠시 후면 굳은 딱지처럼 떨어지겠지 (좀 더 기억되리라) 만
그 딱지를 떼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부끄러운 어제는 벌겋게 달아올라 따가움과 화끈거림을 준다.
말끔해진 어제를 포장하려 향기를 발라보지만
스킨로션이 주는 쓰라림도 그렇고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잊혀지지 않는가 보다)
2.
전기면도기 모터소리는 쉬이,
잊혀져가는 어제의 아우성을 가려준다.
말끔하게 어제를 잊게하지는 않지만
언제 어디서나 불쑥 어제가 고개를 들 때마다
아쉬움이,
부끄러움이,
가슴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주어 좋다.
쓰라림도 덜하다.
매정하게 끊지않는 너그러움(?) 탓일까?
하지만 어떤 때는,
그 단호하지 못함이 내겐 더 잔인하다.
면도 후의 까칠함도 그렇고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자꾸 생각이 난다)
3.
오늘도 어제가,
그저께가 쌓여 내 숨을 방해한다.
지저분한 코 밑에,
까칠한 턱 밑에,
내 속의 나는 어제 아침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쉬움과 부끄러움 뿐이지만 (그저께마저 생각이 난다) 서도
거울 속의 나는 오늘 아침에도 말끔하다.
오늘도 면도를 하고 난 후 (잊혀지려나?)
또 그 멋적음에 얼굴을 쓰다듬겠지만 (역시 그렇군)
어제를 잊기 위해 오늘도,
나는 면도를 한다. 하지만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거다 (......)
오늘의 욕실 문을 닫고 나온다.
그 속에 어제가 가두어지길 바란다.
내 속에 어제를 잊기를 바란다.
내일 저 문을 열면 난 또다시 어제에 젖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또다시 난 면도를 하게 될 것이다.
오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일 면도날을 갈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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