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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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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XII

2001.5.7. 아침 7:0 수원 출근길 720번 버스

우리에게
이야기가 마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사랑이 마르는 것이다.
가슴에 묻은 이야기를 캐내어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장식하느라 바쁜 날이 많지만
간혹 뒤로 제껴 둔 얼굴을 기억하는 데는
실상 애를 먹곤 한다.

가슴 시린 것이다,
비오는 날 오랜 시간 동안 메말라 거북 등처럼 딱딱해진
견고한 흙 바닥을 때리는 빗방울의 비명처럼
우리 가슴에 심어 둔 사랑을 두드려 깨우는 것은.

습관처럼 세월을 살아 준 덕에
사랑보다 삶을 택하여 타협하는데 익숙해졌지만,
우리는 수십 년을 같은 길 가는 고통을 마다 않고
날마다 나를 데리고 먼 곳으로 달려가 주는
쇳덩이 차디찬 기차의 슬픔처럼
그런 한결같은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매일의 허무한 발걸음 속에,
차표를 사고, 악수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부지런한 손놀림 속에
너무나 진한 애정, 그것은 마냥 같은 모양새, 같은 이미지로 반복되고,
사랑을 담기에 의미를 잃은 시간의 반복은
우리의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많은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만
정작 문득 귓가에 다가와 주는
어떤 목소리에는 습관처럼 망설이고야 마는 우리,
삶은 이렇게 소의 되삭임질처럼 잘게, 잘게 부숴진다.

굳이 시인으로 살고자 욕심내지 않으나,
다만 사랑, 그것 하나 가득한 마음으로 살기를 소원한다.
버리지 못한 사랑의 기억은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사랑이며, 그 사랑을 사랑하지 못하여 더해지는 고통,
그것은 이제는 이야기를 잊은 우리에게는
일상이라는 아픔보다 깊은 고독이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사랑을 마음에 품고 이야기를 길러 내는 작업이다.
기나긴 그 삶의 밑바닥에 깔리는 앙금은
입을 열어 웃으며 전하는 이야기를 낯선 벽에 그리며,
이야기를 함께 하지 못하는 고독을 감내하는
아름다운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다.
다만 사랑으로 길어지는 내 그림자를 밟는다.
아침 출근길 내리는 비에 사랑을 향한 내 그림자가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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